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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있는 자에겐 가난이 없다

거리를 거닐 때마다 놀라는 일중의 하나는
지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살기가 험악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 외에 웃을 수 있는 동물은 없습니다
사실 아무리 어려웠고 괴롭던 일들도 몇 년이 지난 후에 돌이켜 보면 얼마나 어리석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맙니다
고통도 환난도 좌절도
실패도 적대감도 분노도
노여움도 불만도 가난도..
웃으면서 세상을 보면 다 우습게 보입니다
그래서 웃고 사는 한 결코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백번의 신음소리 보다는 한번의 웃음소리가 갖는 비밀을
빨리 터득한 사람이 그 인생을 복되게 삽니다
연약한 사람에겐 언제나 슬픔만 있고
위대한 사람에겐 언제나 소망의 웃음만 있습니다
더 잘 웃는 것이 더 잘 사는 길입니다
더 잘 웃는 것이 더 잘 믿는 것입니다
더 잘 웃는 것이 더 큰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을 때 우리는 부유해 집니다

- 웃음 바이러스 중 - 

침몰선의 데이트

발트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거친 바다 중 하나야 . 1년 중 절반 넘는 기간 동안 수온이 0도 이하로 내려가며 겨울에는 발트해 전체의 45퍼센트가 얼어붙는다. ‘역대급’이라 할 해양 인명 피해 사고라 할 사고의 무대도 발트해인 적이 많았지. 1945년 1월,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의 쇄도를 피해 피난민 1만명을 싣고 항해하던 독일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소련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어. 꼼꼼하기로 이름난 독일인들조차 “장부가 모자라” 승선 명단을 작성하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니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르지. 생존자는 1300여명에 불과했다. 무려 9천4백여 명의 목숨이 발트해의 차가운 바닷물 아래로 들어간 거야. 타이타닉 호의 희생자의 여섯 배.
그로부터 반 세기 후 발트해는 또 한 번 그 무서운 얼굴을 드러낸다. 희생자는 1994년 9월 28일 발트해에서 침몰한 에스토니아 호였어. 2800톤의 길이 156 미터, 너비 28미터의 로로선이었어. 즉 화물과 승용차를 실을 수 있는 세월호와 비슷한 형태의 배다. 803명의 승객과 186명의 선원 989명이 승선했고 화물은 적재 허용량에 거의 육박하는 수준의 최대치로 실렸어. 불길한 징조는 출발부터 있었다. 화물 적재 허용량을 넘기지는 않았지만 화물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배는 약간 왼쪽으로 기운 채 항행을 시작했던 거지.
파도는 4미터에서 6미터로 높게 일었으나 그 정도는 발트해에서 특별한 파도가 못됐어. 에스토니아 호도 정상적으로 운항하는 듯 보였지. 사망자 444명을 낸 스웨덴 인들을 비롯해서 에스토니아, 핀란드, 러시아 등 각국에서 온 승객들은 에스토니아 방문 소감을 곁들이며 맥주로 축배를 들거나 밤바다의 정경을 만끽하며 배 위에서의 밤을 평온하게 맞았을 거야. 문제가 발새한 것은 다음날 새벽 1시 경.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시경 선체의 아래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쾅! 그리고 1시 10분 경 승객들이 느낄 정도의 소리와 함께 선수 쪽에서 램프도어가 파손된 듯 바닷물이 쏟아져들어오기 시작했다. 램프도어란 로로선 (차량을 싣는 배)에서 차량 진입을 위해 들어올려지는 바로 그 부분이다. 배는 순식간에 기울었어. 그리고 세월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1시 20분 경 찢어지는 목소리의 선내 방송이 ‘’비상‘임을 알리긴 했는데 대다수의 승객들은 그 방송을 이해하지 못했어. 영어나 스웨덴어가 아닌 에스토니아 어로 방송이 됐으니까.
배는 20분도 못가서 거의 90도로 기울어 버렸어. 승객들은 대부분 정전으로 암흑이 된 선실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아야 했지. 90도로 기울어지고 어둠에 휩싸인 배에서 빠져나올 방도는 없었어. 한 생존 스웨덴 청년의 인터뷰는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내가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에스토니아 호의 마지막 무전은 “침몰 중! 엔진이 꺼졌다!” 였다.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1시 50분. 에스토니아 호는 다른 배들의 레이더 화면에서 사라지고 말아. 1시간도 채 안돼서.
구조 작업은 필사적으로 이뤄졌어, 침몰 20분 뒤 도착한 인근의 배들은 구명정을 투하했고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날아온 해군 헬기들은 한국 해경과는 다르게 목숨을 건 이착륙을 불사하며 바다 위에 떠 있던 승객들을 구했어. 그렇게 구한 사람이 137명. 발트해의 수온은 10도 남짓으로 매우 낮았고 저체온증을 이기지 못해 구조된 뒤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고 바다에 떠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죽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850여명이 죽었어.
그 침몰의 아수라장 속에서 많은 이들이 공포에 질려 울부짖다가 죽어갔겠지. 하지만 영화 <타이타닉>에서 보듯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온갖 아름다움과 추함을 다 연출하며 본연의 모습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 에스토니아 호의 비극의 틈새 사이에서 피어난 한 젊은 커플의 이야기는 그 한 예가 될 게다.
켄트 할슈테트와 사라 헤드리니어스. 이 스웨덴 남녀는 운명의 9월 28일 에스토니아 호에서 처음 만났어. 둘은 서로 호감을 느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발트 해의 밤을 지새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새벽에 하늘이 무너지는 난리를 당한 거야. 삽시간에 배가 기울고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왔을 때 켄트가 사라를 부른다 사라! 충격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던 사라는 켄트를 돌아봤지. 그런데 켄트는 뜻밖의 말을 토해 낸다. “여기서 살아남으면요. 스톡홀름에서 저녁 같이 해요.”
참 분위기 판단 못하는 데이트 신청 같기도 하지만 아마 막상 그 자리에 있었으면 너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네' 라고 답했을 거야. 그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면 누구와 데이트를 하든 무슨 상관이겠어. 또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남자라면 급호감이 들 수도 있을 게고. 둘은 데이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밀려드는 바닷물과 싸우다가 함께 차가운 발트해로 뛰어든다.
둘은 구명 뗏목을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올라타는 데에 성공했지만 문제는 저체온증이었어. 이미 흠뻑 젖어버린 그들의 몸을 겨울 바다 바람은 칼질하듯 톱질하듯 저미고 썰어 냈다. 와들와들 떨던 사람들이 곧 고개를 떨구고 죽어갔어. 켄트와 사라는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서로를 끌어안고 버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했을지도 모르지. “사라 졸지 마요! 졸면 죽어!” “켄트.... 저녁 식사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떡하죠?” “이러지 마요 사라. 스톡홀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와인이랑 스테이크 썰게 해 줄 테니까!” 뭐 이런 식으로.
파도가 크게 일면서 구명 보트마저 뒤집히고 말았어. 거기 타고 있던 사람들은 바다로 곤두박질쳐 들어가지. 한참 뒤 기적적으로 사라는 물 위로 떠올랐어. 아마 사라는 가장 먼저 켄트의 이름을 불렀을 거야. 하지만 켄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켄트를 부르는 사라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얹혀질 무렵에야 갑자기 머리 하나가 시커먼 물 위로 솟아올랐어. 켄트였어. 이때 사라는 막 데이트 신청을 받은 생면부지의 남자가 아니라 10년은 사귀며 정이 들대로 든 남자가 물 위로 솟아오른 기분이었을 거야.
다행히도 둘은 무사히 구출된다. 그 보트에 있던 14명 중 여섯 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리고 병원에 치료 받던 중 몰려든 기자들에게 사라와 켄트는 사건 현장을 증언하면서 자신들의 사연도 밝혔나 봐. 사라는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니까 말이지. “물론 켄트의 데이트 신청은 아직 유효합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불구덩이 속에서건 물지옥 앞에서건 진퇴양난에 첩첩산중의 위기에서건 오리무중 황당무계한 미로 속에서건 닿을 사람과 닿고 피울 꽃은 피워 가는 법이야. 켄트와 사라처럼. 그 뒤에 어떻게 됐을까까지는 묻지 마라. 그 인연이 굵었다면 지금쯤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을 것이고 좀 가늘었다 하더라도 저마다의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겠지. 그날의 찢어지는 비명들과 밀려드는 물의 차가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체온을 나누던 사람의 기억이 그리 쉽게 잊혀지기야 하려고.
ㅡ From 후배 김형민PD

록 허드슨의 슬픔

오늘은 좀 특이하게 슬픈(?) 사랑 얘기를 해 볼까.
1985년 10월은 명배우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떠들썩했었어. 덕분에 ‘명화극장 키드’였던 나는 추억의 명화들을 ‘추모특집’으로 무더기로 보는 즐거움을 누렸지만 말이다. <자이안트> <왕과 나> <9> <황야의 7인> 같은 영화들이었지. 10월 2일에는 록 허드슨이 죽었고 10일에는 대머리의 제왕 율 부리너가 죽었거든. 애들이 슬슬 담배를 배우기 시작하던 중3때였던지라 율 부리너의 마지막 영상 출연이었던 금연 캠페인은 교육상 목적으로 학교에서도 틀어 줬지. 그때 한 녀석의 멘트가 기억난다. “율 부리너 말하면서 손을 책상 밑으로 넣어서 더듬거리면서 뭘 찾고 있재? 그거 담배 찾는 기다.”
율 부리너는 담배(?) 때문에 폐암으로 죽었다지만 록 허드슨의 죽음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지. 그는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한 이름 AIDS에 걸려 죽었다. 아마 나도 그때 AIDS라는 병의 이름을 처음 들었지 싶네. <자이안트>에서 봤던 그 조각같은 미남을 그의 친한 친구였던 도리스 데이의 토크쇼에 등장했을 때의 송장같이 야윈 병자로 둔갑시킨 병은 실로 무서워 보였지. 더구나 약도 치료법도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요즘의 에볼라같은 음산한 소문은 더욱 공포를 키웠고 말이야. 병만큼 놀라운 건 저 헐리우드 역대 최고의 미남 중의 하나로 꼽히는 록 허드슨이 ‘동성연애자’였다는 사실이었지.
록 허드슨의 본명은 로이 해롤드 쉬어러 주니어..... 카센터 직원이었던 아버지와 전화교환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미국 하층 노동자들 삶이 많이 그랬듯 단란한 가정에서 크지는 못했어. 그리고 록 허드슨이 대사를 못외워서 고생했다는 후문을 보면 부모에게서 지능을 물려받지도 못했고. 하지만 부모는 그에게 그 모든 것을 커버할만한 선물을 줬지. 198센티미터의 키와 아폴론같은 얼굴, 그리고 남자다우면서도 달콤한 네 귀에 캔디같은 목소리까지.
얼굴과 키 하나만 믿고 그는 헐리우드에 도전했고 잘생긴 것들이 대우받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인지라 그는 영화배우로 데뷔하는 데 성공해. 첫 촬영 첫 대사 때 NG를 38번을 냈다니 그다지 성공적인 데뷔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왕년에 재연 드라마 찍을 때 어느 단역배우에게 “너 죽고 싶어?” 이 멘트 하나를 줬다가 두 시간을 잡아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한 마디가 오케이 나는 데 두 시간이 걸린 거야. 정말 죽이고 싶더라. 록 허드슨을 처음 데뷔시킨 감독도 그랬겠지. “저 멀대는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거야.”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의 출세작은 <자이언트>였어. 가끔 <자이언트> DVD를 보거든? 엘리자베드 테일러의 한창 때 미모를 즐기는 게 주 목적이고 제임스 딘의 반항적인 연기를 보는 것도 재미지만 록 허드슨의 20대에서 60대까지의 연기를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단다. 솔직히 연기는 못해. 그런데 그래서 그 역이 어울려. 아내를 사랑하지만 완고하고 촌스런 대농장주 록 허드슨은 멕시코 인들에 대해 편견을 심하게 가진 텍사스인이었지. 그런데 세월이 가고 그 아들은 멕시코인 며느리를 맞아들였는데 황망해 하면서도 어느 날 식당에서 자신의 며느리를 모욕하는 백인에게 주먹을 날린다. 물론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객기였기에 반격을 당해 큰 키가 구겨져서 식당 구석에 처박히기도 하지만.
묘하게도 나는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 뭇 여자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마초적 미남. 수천 마리의 소 속으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카우보이. 하지만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고 또 자신의 며느리를 모욕한 이에게 서슴없이 주먹을 날리는 시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록 허드슨은 참 우직한 매력남이었으니까. 아마 아무 조건도 기약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겨 보려는 여자들이 1개 사단은 넘었을 거야. 이건 여성 비하가 아니다. 내가 여자라도 뭐 그럴 거 같으니까. 그런데 슬픈 건 록 허드슨은 그 풍요 속에서 처절한 빈곤을 맛보았을 거라는 거. 그는 성적 소수자였으니까.
5-60년대 헐리웃에서 성적 소수자임을 밝힌다는 건 그 시절 한국에서 “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라고 밝히는 것과 비슷한 수위의 자살 행위였지. 록 허드슨도 그렇지만 록 허드슨으로부터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영화사와 매니저들도 필사적으로 그 비밀을 숨기려 들었지. 기실 그런 사람들은 많았다. 가냘픈 젊은이의 전설 몽고메리 클리프트도, 피아노를 잘 쳤던 타이론 파워도 성적 소수자였으니까. 그들도 평생 그걸 숨기면서 살아갔으니까. 록 허드슨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소문이 흘러나오자 매니저는 자신의 여비서를 록 허드슨과 결혼시켜 버리는 강수를 두지.
사랑하지 않는,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의 팔짱을 끼고 축하를 받고 매스컴을 장식하며 활짝 웃는 록 허드슨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 그 아내(?) 필리스가 허드슨의 성적 정체성을 알고 위장 결혼해 준 건지, 아니면 록 허드슨이 작정을 하고 유혹하는 체라도 한 건지는 둘만이 알 테지만 필리스는 그의 좋은 동반자가 아니었어. 둘의 결혼 생활은 3년만에 끝나지만 필리스는 이혼 전에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중요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해. 허드슨의 성적 취향을 놓고 “치료를 할 것인지 감출 것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눈 걸 녹음한 거지. 그리고는 뭐 뻔한 스토리. “깔까? 아님 돈?” 록 허드슨은 21세기 한국의 이병헌이 아니었고 협박에 굴복해야 했다고 해. 필리스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록 허드슨은 그 후로도 평생 동안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충실하게 숨기지. 단짝 여배우였던 도리스 데이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물론 소문은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어쨌건 공식적으로 폭로되거나 고백한 적은 없었어. 그가 ‘간암’으로 쓰러질 때까지도. 죽기 직전 그의 병이 AIDS라는 것이 밝혀졌지. 이 사실은 미국 연예계에도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켰지. 그와 농도 깊은 키스신을 나눴던 한 여배우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때는 미국 사회도 AIDS에 대한 지식이 얕았을 때니까 무리도 아니지.
그의 사후 그의 또 하나의 사랑(?)이 드러나지. 그의 사랑이었던 마크 크리스천이 소송을 건 거야. 그는 록 허드슨이 AIDS에 걸린 걸 알았으면서도 자신에게 그걸 밝히지 않았다며 소송을 했지. “나는 그를 비난할 의사는 없습니다. 내 말은 AIDS에 걸렸다면 상대방에게 말을 했어야 한다구요. 유명 배우든 우편 배달부든 말이죠.” 그는 승소했고 허드슨의 재산 수백만 달러를 얻지. 하지만 그도 사후 록 허드슨을 비난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박했다고 해. “행동 하나로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에이즈에 관한 일은 내가 아는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록 허드슨은 왜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건 또 한 번 버림받고 싶지 않았던 이기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척 연기해야 했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상대로부터 무수하게 구애를 받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엉뚱한 여자와 결혼하고, 그 ‘아내’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다가 그걸 녹음당하고 협박당하고, 자신의 절친들에게조차 모든 것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한 외로운 인간의 몽니라고나 할까. 그걸 추호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는 간다. 키에르케고르를 들지 않더라도 외로움이 사람에게 어떤 작용을 미치는지 알 테니까. 배신의 아픔이 어떤 건지는 뭐 너희가 더 잘 알거고.
ㅡ From 후배 김형민PD

퀴리 부인의 사생활

벨기에 사람 어네스트 솔베이의 주창으로 국제 물리학, 화학 학회가 처음 열린 게 1911년 10월 29일이었어. 아인슈타인과 퀴리 부인 등 위인전 단골 인사를 포함해서 쟁쟁한 과학자들이 모였고 이후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유서 깊고 정평 있는 모임이지.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아. 허구헌날 수우미양가 중 미를 받아야 했던 물리, 화학을 어렵게 만든 장본인들이니까 말이지. 구시렁구시렁. 너희는 또 그것도 점수냐고 타박할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첫 솔베이 회의는 그 참석자들의 면모와 논의 내용의 우수함과는 별도로 좀 민망한 스캔들이 얽힌 회의이기도 해. 스캔들의 주인공은 폴란드 출신의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즉 퀴리 부인과 역시 회의에 참석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이었지. 폴란드 여자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에게 퀴리의 성을 안겨 줬던 피에르 퀴리는 그로부터 6년 전 석탄 가득 실은 마차에 치어 죽는다. 프랑스 최고의 두뇌이면서 동시에 아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착한 남편 피에르가 허무하게 갔을 때 마리 퀴리의 나이는 서른 여덟 살이었어. 학자로서도 여자로서도 한창 나이였다는 것.
랑주뱅은 피에르의 제자였어. 그리고 퀴리 부인보다 여섯 살 연하였지. 퀴리 부인이 남편을 잃었다면 랑주뱅은 기질 승한 마누라에 시달리고 있었단다. 수틀리면 병으로 과학자의 제1재산이라 할 머리통을 내려찍기도 했다니 대충 짐작이 가겠지? (그런데 이유가 바람기라면 뭐..... 얘긴 달라지겠지만) 이 아픔 있는 이들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 아니면 오해인지는 검색으로도 확정이 안되네. 어떤 이들은 이 스캔들 자체가 랑주뱅의 못된 마누라가 편지를 위조하고 ‘폴란드 계집’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배타적 감정 (드레퓌스 사건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음을 기억해 보렴) 이 버무려지고 황색 언론의 뻥튀기 보도가 곁들여진 완벽한 허위이며 공식적인 증거는 없다고 주장해.
일단 그런 주장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나는 퀴리 부인이 당연히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아니 그게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남편이 죽은 뒤 그녀는 대신 맡은 남편의 강의에서 정확하게 남편이 강의한 뒤부터 진도를 나갔을 만큼 남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고 남편의 유지에 따라 더욱 과학 연구에 정진했어. 그런 그녀의 사랑이 그녀에게 불명예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열녀문을 세워 줄 것도 아니고. 또 친구들도 마리 퀴리가 랑주뱅의 재능과 인품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증언은 많이 하고 있어. “마리는 랑주뱅의 경이로운 지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주위 사람들이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물리학자 장 패랭의 아내 앙리에트)
어쨌든 둘의 관계를 의심했던 랑주뱅의 악처는 남편을 감시한 끝에 퀴리 부인의 편지를 가로채는데 성공했고 한바탕 난리가 나지만 친구들의 중재로 일단 넘어갔다고 해. 하지만 랑주뱅의 아내는 거기서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고 퀴리부인의 실험실까지 몰래 뒤져서 또 다른 증거(?)들을 찾아내. 그 증거(?)들을 보면 퀴리 부인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해. “더 이상 당신의 아내를 임신시키지 말아요. 그건 우리의 결별을 의미해요.” 글쎄 아인슈타인이 “청어보다 차가운 여자”라고 평한 퀴리 부인이 썼다고 받아들이기엔 좀 뭐하지만, 사람의 속을 누가 알 수 있겠니.
어쨌든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 랑주뱅의 아내. 랑주뱅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해 버렸어. 원래 질투가 발동한 여자의 촉이란 상어의 피 냄새 반응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정확하지. 그녀의 레이더망에 브뤼셀에서 열리고 있던 솔베이 학회에 둘이 참석하고 있음을 알고는 발라당 뒤집어져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언론에 모든 것을 폭로해 버려. 유태인 드레퓌스를 잡았던 프랑스 극우 언론 (꼭 조중동스러운)들은 폴란드 여자의 프랑스 유부남 낚아채기를 신나게 기사로 긁지. 그 중 한 기사 첫 줄은 아주 유명하단다. “그렇게 신비스럽게 비추던 라듐의 불꽃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그 작용을 연구하는 과학자들 중 하나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그리고 이 과학자의 부인과 아이들은 눈물 속에 있다.” 이런 여성중앙스러운.
랑주뱅은 격노해서 신문 편집자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20세기 초까지도 결투가 불법이 아니었다는?) 무기는 총. 몇 발짝 걷고 뒤돌아서서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편집자는 총구를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어. “프랑스 최고의 두뇌를 죽이긴 싫소.” 이 상황에서 그 머리에 총을 갈길 수는 없었던지라 결투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고 퀴리 부인의 집 앞에는 폴란드 여자 물러가라는, 어디에나 있는 오지랖 넓고 정의감 넘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지. 퀴리 부인이 몸을 피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프랑스 과학계는 싸늘했어. 결정적인 건 노벨상 위원회의 동요였지.
스캔들이 본격화하기 전 노벨상위원회는 퀴리 부인에게 두 번째 노벨상을 결정했지만 퀴리 부인과 랑주뱅 사이의 편지(위조?)가 공개되고 랑주뱅과 신문 편집자간에 결투가 벌어지고 난리굿판이 벌어지자 이거 안되겠다 꼬리를 뺀 거지. 노벨상 아카데미 위원 아레니우스는 퀴리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만일 그 편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노벨상 아카데미는 부인의 수상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카데미 사무총장이나 제게 이곳으로 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전보를 쳐 주십시오. 법적으로 랑제방과 당신이 관계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에는 상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곧 죽어도 자기들이 수상을 거부한 게 아니라 퀴리 부인이 결연히 “나의 결백이 입증되기까지는 수상을 거절”하는 모양새를 내 달라는 지극히 한국 남자들스러운 발상.
여기서 퀴리 부인은 그녀의 과학자로서의 업적 이외에 또 다른 형태의 ‘위인’으로서의 풍모를 보여 줘. 이런 답을 쓴 거지. "아카데미의 의견에 제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저는 제 신념에 따르겠습니다. 당신의 조언은 잘못입니다. 상은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에 수여된 것입니다. 과학적 연구에 대한 평가가 사생활에 대한 중상과 모략에 의하여 영향 받는 건 부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대놓고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의 관자놀이에 명중하는 라이트 훅 한 방. “나는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부라보.
퀴리 부인은 꿋꿋하게 스웨덴으로 향하고 노벨상을 받아. 이때 힘을 실어 준 게 아인슈타인이라더군. 자기 마누라한테는 못할 짓을 했던 이 위인이 마리 퀴리에게는 “언론 보도 따위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퀴리 부인을 응원하지. 그런데 마리 퀴리는 고맙다가도 떨떠름했을 거야. 이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 언론에는 “에 또 퀴리 부인은 누굴 유혹할 깜냥이 못돼요. 그러니까 똑똑하고 열정적이지만 누구에게 치명적일만큼 매력적이지는 못하다구요.” 라고 퀴리 부인을 변호(?)했거든. 이게 지금 편을 드는 거야 디스하는 거야. 어쨌든 퀴리 부인은 그 숱한 스캔들과 프랑스 언론의 압박과 스웨덴 노벨상 위원회의 우려를 무릅쓰고 당연히 받아야 했지만 받는데 난항을 겪었던 노벨상을 받는다. 그러면서 위기를 돌파했고 스캔들도 갈수록 잦아들었지. 랑주뱅은 가정으로 돌아갔고.
이 스캔들이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나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오히려 나는 사실일 때 마리 퀴리는 더 존경스러워진다. 그 사랑이 가져다 준 충격과 공포 속에서도 의연하게 “나의 사생활과 과학적 연구에 대한 평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당당하게 맞설 줄알고, 자신의 권리를 또박또박 주장하며 두 번째 노벨상을 거머쥐어 돌아간 남편과 자신의 명예를 드날린 여자라면 나라도 목을 매고 사랑하고 싶어지지 않겠냐고.
더 재미있는 건 퀴리 부인의 맏딸 이렌 퀴리의 딸, 그러니까 손녀딸 엘렌 줄리오는 랑주뱅의 손자와 결혼했다는 거. 마침내 사랑은 손녀대에 이뤄진 것일까? 이 모든 걸 지켜보던 퀴리 부인의 둘째 딸 에브 퀴리, 엄마의 전기를 쓰면서 거의 모든 것을 들여다봤을 그녀는 놀랍게도 103세까지 살다가 2007년에야 죽었어. 어때?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니?
ㅡ From 후배 김형민PD

정직은 가장 확실한 자본이다. - 에머슨 -

한 젊은이가 어느 장터 길가에 떨어진 가방을 주웠습니다. 그 가방 안에는 누구라도 욕심을 부릴 만큼 상당한 거금이 들어있었습니다.
돈 가방을 들고 주변을 살피던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방을 바닥에 툭 던져 놓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아 한가로이 햇볕을 쬐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따스한 햇볕에 졸기 시작한 젊은이 앞에, 눈에 불을 켜고 땅 위를 살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젊은이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무슨 찾는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내가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아무래도 여기에 떨군 것 같아요."
그러자 젊은이는 깔고 앉았던 가방을 남자에게 툭 던지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찾고자 하는 가방이 이거 아닙니까?"
가방을 보고 깜짝 놀란 남자는 너무 고마운 마음에 젊은이에게 큰돈을 사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딱 잘라 말했습니다.
"돈이 가지고 싶었으면 그 가방을 들고 벌써 가버렸을 겁니다. 돈은 필요한 사람이 요긴하게 잘 써야지요."
이 젊은이가 바로 우리나라 독립선언서 주창자 33인 민족대표 중 한 분인 '손병희' 선생님이십니다.
정직은 마치 집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세울 때 약삭빠르게 요령껏 쌓아 올리는 것을 현명하고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직하고 우직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집만이 오랜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정직은 가장 확실한 자본이다.
- 에머슨 -

가우가멜라 전투와 알렉산더

영화 보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알렉산더>라는 영화를 봤을 리 없겠지? 이 영화에서는 여러 전투 장면이 나오지만 가장 압도적인 전투 하나가 등장하지. 가우가멜라. 페르시아 말로 낙타의 집이라는 뜻이었다는데 이 가우가멜라에서는 고대 세계사에 기록될 대전(大戰)이 펼쳐졌지. 바로 페르시아의 ‘왕 중 왕’ 다리우스 3세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가 이끄는 수십만의 대군이 제국의 흥망을 놓고 벌인 전투였어. B.C. 331년 10월 1일.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보면 소년 알렉산더의 면모를 잘 일러 주는 일화 하나가 등장하지. 바로 그의 애마 부케팔로스와 관련된 것인데 부케팔로스는 뛰어난 말로 보이긴 했지만 워낙 거칠어서 누구도 살 사람이 없었지.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포스도 고개를 저었고 말이야. 그런데 난데없이 소년 알렉산더가 부케팔로스를 길들여 보겠다고 나서. 그는 놀랍게도 콧김 푸르륵거리는 거친 말 부케팔로스를 길들이는데 성공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어. “그림자에 놀란 것이니 태양 쪽으로 돌아세워 그림자를 보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콜롬부스의 달걀 같은 얘기겠지만 사람들은 사람이건 말이건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꼴을 보면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라고 포기해 버리잖니. 그 이유는 잘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그 이유가 제거되면 어떤 가능성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알렉산더는 저 말 탐나는데? 욕심을 내고 그런데 왜 저럴까?를 고민했던 거고 답을 찾아냈던 거야. 일단 보통내기는 아니지.
그의 짧지만 파란많은 일생을 팔로우하기에는 점심 시간이 짧고, 가우가멜라 전투 얘기로 가 보자. 알렉산더는 B.C 333년 소아시아 원정을 개시하면서 오랫 동안 그리스의 숙적 (그러기엔 너무 덩치가 큰) 페르시아 제국에 발자국을 찍는다. 이 원정 초반에도 그는 ‘콜롬부스의 달걀’같은 일을 하나 벌이지. 바로 고르디온이라는 곳의 신전에 매인 복잡한 매듭과 그에 얽힌 전설, “이 매듭을 푸는 자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는 사연을 듣고는 바로 칼로 그 매듭을 쳐서 잘라 버린 거지. “어때 풀렸지?”
노쇠 지경에 들어간 페르시아 제국이었지만 이집트에서부터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서아시아 일대를 호령하던 나라야.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라는 곳에서 알렉산더와 정면 충돌하지만 박살이 나고 만다. 심지어 왕의 가족들까지 알렉산더의 포로가 됐어.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를 회유하려 든다. 아마 먼 훗날의 을지문덕의 시를 빌려오고 싶었을 거야. “신묘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절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움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은 비아냥거린 거였지만 다리우스는 진심이었겠지. “지금까지 정복한 땅 다 당신에게 주고 내 딸까지 주겠다. 당신은 서방의 대왕, 난 동방의 대왕으로 우리 동서테당트를 즐겨 보자.”는 거였지만 알렉산더의 대답은 네버.
결국 다리우스 3세는 휘하의 모든 병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가우가멜라에서 알렉산더 군을 맞이해. 과장 심한 옛 사가들은 100만 대군이라고 하는데 그럴 리는 없고 대략 15-20만. 알렉산더군은 대충 5만이 안되고. 죽기 아니면 살기의 다리우스 3세도 준비를 열심히 했어. 주력병기인 전차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가우가멜라 평원을 단단하게 다져 놓을 만큼. 인도 지역에서 온 기병과 그리스 사람이지만 페르시아를 위해 싸우는 용병대까지 페르시아 영토 전역에서 몰려든 대군이 알렉산더에게 창을 겨눈다.
일단 기선 제압을 위해 페르시아의 낫 전차들이(영화 벤허에서 멧살라가 몰던 것보다 훨씬 큰 낫이 달린)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지만 잘 훈련받은 그리스 보병들은 제동과 전환이 어려운 마차의 성격을 역이용해서 마지막 순간에 살짝 피해 버린 뒤 옆구리를 찔러 버리는 수법으로 격파한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가 맘 먹고 모은 기병대들은 달랐지. 기병대야말로 페르시아군의 주력부대였으니까.
일단 그리스군 왼쪽의 파르메니온 장군 부대는 페르시아 기병대의 맹공에 시달렸고 그리스군우익에도 페르시아 기병대가 달려들었는데 알렉산더가 지휘하는 그리스 우익 기병대는 앞으로 돌격이 아니라 옆을 향해 달리는 이상한 기동을 해. 페르시아군도 이게 뭔가 싶어서 나란히 말을 달렸지. 물론 뒤로 돌아들어 자신들을 포위하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 그런데 그리스 기병대 사이가 일으킨 흙먼지 사이에서 한떼의 경무장 보병들이 튀어나와. 갑옷도 입지 않고 칼 창도 제대로 안든 돌팔매병들 위주의 보병들.
이들은 닥치는대로 돌을 던지며 페르시아군의 말을 공격했고 페르시아 기병대는 혼란에 빠져. 그래서 페르시아군 중앙과 좌익이 틈이 갈라진 찰나 알렉산더는 명마 부케팔로스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스스로 군의 최선두에서 페르시아 군의 벌어진 틈을 향해 뛰어든다.
알렉산더는 자신 휘하의 좌우익 기병과 중앙의 보병들이 페르시아군의 맹공을 버텨 주리라 믿으면서 망치를 치켜든 채 페르시아군의 머리를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거야. 하나 더한다면 알렉산더는 몇천리 밖 원정길, 패배하면 죽거나 잘 풀려봐야 노예라는 걸 알고 있는 그리스 병사들과 갑자기 우격다짐으로 끌려나와 창과 방패를 든 농민들이 대부분인 페르시아 군의 차이를 알고 있었지. 덩치만 큰 거인을 쓰러뜨리려면 팔 다리를 공격할 게 아니라 머리를 쳐야 한다는 것도.
제대로 훈련 안된 페르시아 보병들은 벼락같은 알렉산더와 그 친위 기병대의 돌격에 혼비백산해. 다리우스 3세의 호위병들이 앞을 막아 봤지만 죄다 낫 앞의 풀같이 베여 넘어지고 말아.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는 여기서도 왕 노릇을 못하고 만다. 그리스군이 육박하자 떨쳐 일어나 싸우지 못하고 또 마차를 타고 도망한 거야. 페르시아 기병대가 그리스 마케도니아군의 본진까지 쳐들어가 알렉산더의 포로였던 다리우스 왕의 가족들을 구출하는 상황에서 본진이 싱겁게 무너져 내린 거지.
그리스 부장 파르메니온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며 아우성치며 SOS를 치지 않았더라면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잡을 수 있었을 거야.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포기하고 돌아와 페르시아 기병대를 격파한다. 가우가멜라 전투는 그렇게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었지.
알렉산더는 천재적인 지휘관이었고, 욕망 앞에 참 단순한 사람이었어. 그의 모든 지혜와 통찰은 끝없는 욕망을 실현시킬 때에 가장 극대화됐어. 명마 부케팔로스를 얻고 싶다는 욕망이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말을 갈파해 냈듯, 그는 고대 세계 최고의 장군으로서 가장 많은 적들을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무찔러. 산이 거기에 있어서 오르는 등산가처럼 그는 땅이 있는 한 그 땅의 정복자가 되고 싶어했지. 그러나 산악자전거부터 외발자전거까지 자전거의 천하 없는 명인이라도 자전거는 멈추면 넘어지는 법이야. 알렉산더는 바로 그 자전거 같았다고나 할까.
그는 움직이기 싫어하는 군대를 끌고 사막과 고산을 넘어 인더스강변까지 이르렀고 코끼리 부대를 거드린 인도의 지방 영주 포로스의 군대를 격멸시키지. 여기서 그의 명마 부케팔로스가 상처를 입고 죽어. 하지만 알렉산더는 계속 진군을 명했지만 그때 이 위인은 평범한 인간들의 저항을 받게 돼. “아무리 정복해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향의 처자식입니다.” 천하의 알렉산더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생각 대신 냅다 칼로 잘라버렸던 알렉산더였잖아. 그는 이렇게 대꾸했을지도 몰라. “페르시아에는 여자 없냐? 고향의 마누라만 마누라냐? 거 참 이상하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행동했어. 다리우스의 딸과 결혼했고 페르시아의 변방 박트리아를 공격하던 중 그곳의 귀족의 딸 록산느와도 결혼해서 유일한 아들을 남기지. 고향에 돌아갈 생각보다는 새로운 땅에 계속 눈을 돌리며 인도에서 돌아와서도 아라비아를 곁눈질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 돼.
요즈음 너희가 그다지 흥미가 없을 전쟁 얘기를 중지하지 않는 건 전쟁의 무용담과 전투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람들 얘기를 들려 주고 싶은 때문이고, 나 자신 재미있고 책 속의 영웅부터 악당들을 한 번 불러 내서 내 나름대로 쓰다듬고 후려치고 깎아내고 덧붙이고 하는 흥미가 쏠쏠하기 때문일 거야.
알렉산더는 정말 천재적인 사람이었어. 먼 훗날 한니발이 인정했던 고대 세계 최고의 장군이었지. 하지만 그의 욕망은 강렬했으나 그 폭이 좁았으며 그의 지혜에는 배려가 없었고 그의 결단은 너무나 쉽게 내려졌어. 한 그리스 매춘부가 “옛날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태웠듯 대왕도 페르세폴리스를 태우소서” 하는 말을 듣고 술 취한 김에 ‘세계의 수도’라 할 페르세폴리스를 잿더미로 만든 예에서 보듯. 어때. 우리 역사에도, 우리 주변에도, 우리 신문 지상에도 그런 사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지 않니.
알렉산더의 영향력은 2천년을 넘어 증명된다. 알렉산더가 없었으면 경주 석굴암도 없었을 거야. 국사 시간에 가물가물 배웠을 ‘간다라 미술’이라는 거..... 인도의 코앞까지 들어왔던 그리스인들이 아니었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거거든. 원래 불교 교리상 불상을 만드는 행위는 권장된 게 아니었어. 하지만 별의 별 신들을 다 조각했던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받아 불상도 제작되기 시작한 거라고 하지. 옷자락이 섬세하게 묘사된 조각풍 또한 그리스의 것이고.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말썽 많았던 지역의 이름, ‘칸다하르’를 기억하니? 그 이름은 알렉산더에서 온 거란다. 지구본에서 그리스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를 한 번 살펴 보면 알렉산더의 “못먹어도 GO!"의 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ㅡ From 후배 김형민PD

꽃과 함께

날마다 꽃을 키우는 우리
내 꽃은 나를 기다립니다
멋스런 포장지가 벗겨나가는 왁자지껄,
손을 기다리는 다소곳한 순수,
나는 두 팔을 뻗어 내 꽃을 높이 듭니다

꽃은 나의 아바타,
나는 꽃의 아바타
공감할 때 행복하고
시간을 내줄 때 평안하고
그리고, 밥을 잘 먹을 때 튼튼해요

꽃의 밥은 나의 마음
내 꽃은 마음향기를 퍼뜨리고
나는 꽃과 함께 웃죠
'오늘' 이예요,
늘 한결같은 내 꽃의 이름....


- 이 공 -

고통의 강을 건너 성공의 피안에 도착한 인간은 다른 사람도 건너 올 수 있도록 자기의 나룻배를 기꺼히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다

" 21세기 트렌드는 나비형 인간, 다른 사람을 성공시켜 꿈을 이룬다 "
인간은 크게 거미형과 개미형, 나비형 등 3가지로 분류된다.
거미형 인간은생산적· 창조적 노력은 하지 않고 과거에 얻은 지식과 경험, 지위나 명성 등을 통해 먹고 산다.
개미형 인간은 부지런히 먹을 것을 수집하지만 자신의 가족이나 기업 등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다.
나비형 인간은, 자신의 몫을 챙기지 않고 쉬지 않고 옮겨다니며 행복과, 사랑과 생명을 전파한다.
다수의 애벌레들은 자기가 '나비'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번데기가 되는 아픔(온몸이 굳어가는 아픔)을 모면하려고 그냥 애벌레로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인간으로 치면, 자기의 꿈을 접고 세상과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가는 부류의 인생들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나비가 된 애벌레는 생애동안 다른 어떤 곤충보다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나비가 됨으로서 평생 100km 이상의 거리를 자유롭게 날고, 꽃가루를 몸에 묻혀 각종 식물과 나무의 열매도 맺게 하는 좋은 일도 한다. 나비가 된 그는 하늘을 날아 숲도 보고, 호수도 보고, 강도 즐긴다
즉, 고통의 강을 건너 성공의 피안에 도착한 인간은 다른 사람도 건너 올 수 있도록 자기의 나룻배를 기꺼히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다. 만일 그냥 애벌레로 남았다면, 평생 나뭇잎사귀 정도의 시야에 갇혀 살아야만 했으리라.
또한 애벌레는 나비와 달리 성숙한 사랑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비가 되면 성숙한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담은 알을 낳고 떠날 수 있다. 이렇게 삶은 출발은 같았으나 그 끝은 장대한 차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원래 우리 모두는 '나비'가 될 운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세상에 부대끼고 본인의 의지 부족으로 나비가 되기를 거부하고 애벌레로 남는다. 나비가 되든 애벌레가 되든 인생은 모두 옵션(Option)이다.
-고영의 "나비형 인간" 중에서....-

늙고 나면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다

어릴 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없고,
나이 들면 나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으며,
늙고 나면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한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진 내 마음이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를 수 없다.
사실 나를 넘어서야 이곳을 떠나고,
나를 이겨내야 그곳에 이른다.
갈 만큼 갔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얼마나 더 참을 수 있는지 누구도 모른다.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된다.
상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결정한다.
또 상처를 키울 것인지 말 것인지도 내가 결정한다.
그 사람 행동은 어쩔 수 없지만
반응은 언제나 내 몫이다.
산고를 겪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꽃샘추위를 겪어야 봄이 오며,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온다.
거칠게 말할수록 거칠어지고,
음란하게 말할수록 음란해지며,
사납게 말할수록 사나워진다.

>글출처:시마을-지혜의향기

내가 성공한 3가지 이유 - 마쓰시타 고노스케

내가 성공한 3가지 이유
나는 하느님이 주신 3가지 은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해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둘째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 항상 운동에 힘써 왔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마쓰시타 고노스케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권위나 전통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의자하면서 생기는 우상. 특정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해당한다.

철학(哲學). 한자 뜻대로라면 ‘밝은 학문.’ 영어는 ‘Philosophy.’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번역되죠? 1561년 오늘 영국에서 태어난 프랜시스 베이컨은 지혜를 뜨겁게, 뜨겁게 사랑한 철학자였습니다.
    
베이컨은 아마 세상의 잣대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서양철학자일 겁니다.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도장을 관리하면서 법무장관을 거쳐 대법원까지 올랐고 남작, 자작의 작위를 받았지요. 그러나 왕권과 의회 권력이 대립했던 당시 의회에 의해 뇌물을 받은 ‘적폐세력’으로 몰려 기소됩니다. 베이컨이 낭비벽이 심해 빚을 갚기 위해서 뇌물을 받았다고도 하고, 그때에는 법관이 금전을 받는 것이 관례여서 정치적 희생양이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베이컨은 “나는 지난 50년 동안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지만, (나를 기소한) 이 판결은 최근 200년 동안 의회가 내린 가장 공정한 판결”이라며 처벌을 달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런던탑에 갇혔다가 곧 풀려납니다.
    
역사에서는 베이컨을 정치인보다는 위대한 철학자로 기억합니다. 당시 학자들은 스토아 철학이나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논리학을 통해 ‘진리’를 이끌어냈는데, 베이컨은 명저 《신기관》(Novum Organum)에서 이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당시 학자들은 논리학의 최대무기였던 ‘삼단논법’으로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A는 사람이다 △따라서 A는 이성적 동물이다! 식으로 진리를 확정했습니다. 그러나 베이컨은 A가 사람인지 아닌지, 사람이 이성적 동물인지 아닌지 관찰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진리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관찰이나 실험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 인식을 ‘우상’(idola)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고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지요?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진리를 찾는 ‘귀납법’의 체계를 세웠는데, 이는 근대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합니다. 하지만, 베이컨도 후대 철학자에 의해 부정됩니다. 귀납법으로 확정했다고 믿은 ‘진실’도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9999만 마리 까마귀가 검은색이어서 “까마귀는 검다”는 명제는 ‘참’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흰색 까마귀가 발견되면 이 명제는 ‘거짓’이 되니까요.
    
근대와 현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진리’를 찾고 있지만, 어떤 것이 진리인지조차 정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곧 진리라는 ‘우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 끼리의 생각이 옳다는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철학적 사유가 빈약해서 똥고집이 센 사람을 ‘자기 철학이 있다’고 박수칩니다.

자신이나 우리가 틀릴 수도, 다른 사람이나 저 편이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이 철학적 사유일 겁니다. 자신이 뭐하는지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남을 비난하는 것도 '철학의 빈곤'에서 오는 현상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서 철학, 지혜에 대한 사랑이 번져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요?  


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에서 자유로운지?

베이컨은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을 네 가지 우상으로 요약했습니다. 저도 뜨끔합니다. 사람이기에 은연중에 이들 우상에 사로잡히기 쉽지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종족의 우상(idola tribus)=인류라는 종(種)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사고가 잦은 것은 잘못된 정치에 대한 징벌” 따위의 생각.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 특정 직업군 사람 몇 사람을 접하고 “그 직업군 사람은 다 그래” 식으로 단정하는 것.
○시장의 우상(idola fori)=사람들과의 교류와 만남에서 생기는 우상. 지역감정, 패거리 악플, 주식시장의 루머나 음모론 등이 대표적 산물.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권위나 전통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의자하면서 생기는 우상. 우리나라에서 황우석 사태는 대표적인 예. 특정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해당한다. 18세기에는 없었던 영화가 ‘극장의 우상화’를 강화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나는 내가 더 노력할수록 운이 더 좋아진다는 걸 발견했다. - 토마스 제퍼슨 -

일기예보에 없던 강한 돌풍과 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낡고 작은 고시원에서 사는 남자는 자신이 일하는 회사 창고의 화물들이 걱정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서 남들이 말하는 좋은 직업을 얻지는 못했지만
화물창고에서 상하차하는 일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들어온 화물이 너무 많아 일부를 창고 밖에 두고 퇴근했는데 갑자기 내리는 비와 돌풍에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혹시 몰라 방수포로 물건을 꼼꼼히 여며놓았지만 비바람이 너무 신경 쓰였던 남자는 결국 일하는 창고로 나가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화물에 씌워놓은 방수포는 바람에 밀려 벗겨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당황한 남자가 방수포를 감싸고 묶은 로프를
몇 겹으로 더하며 비에 쫄딱 젖고 있을 때 역시 화물이 걱정된 사장도 창고로 나와 남자를 도와 마무리 지었습니다.
다음 날, 사장은 남자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자네에게 우리 회사의 관리를 맡기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남자는 당황해서 사장에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전 제대로 된 경력도, 학력도 없는데요."
그러자 사장은 남자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당신이 어제 보여준 모습은, 그런 것들을 뛰어넘고도 남으니 걱정하지 말고 맡아주게나."
남자에게 벌어진 일은 단순히 '행운'이 아닙니다. 성실한 행동과 노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찾아온 행운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쌓아온 노력의 결과입니다.

해가 점점 지고 있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69번째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20세기 초,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10살 정도인 남자아이가 1달러를 손에 꼭 쥐고 거리에 있는 상점마다 들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파시나요?”

가게 주인들은 안 판다고 말하거나 혹은 아이가 장사를 방해한다고 생각해 매몰차게 내쫓기도 했습니다.
해가 점점 지고 있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69번째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좀 파시나요?”

가게 주인은 60이 넘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하나님은 사서 무엇하려고 그러니?”

자신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처음 본 아이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사연을 노인에게 털어놨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삼촌이 돌봐주고 있는데, 얼마 전 삼촌마저 건축 현장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현재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삼촌을 치료하던 의사가 아이에게 “삼촌을 구해줄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하느님이라는 것이 정말 신기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진한 아이는 의사에게 “제가 하나님을 사 와서 삼촌에게 먹일게요. 그러면 꼭 나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말을 들은 노인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돈은 얼마나 갖고 있니?”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1달러요.”
“마침 잘 됐구나. 하나님은 딱 1달러거든.”
노인은 아이의 돈을 받아 선반에 있던 ‘하나님의 키스’라는 음료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여기 있단다 얘야, 이 ‘하나님’을 마시면 삼촌이 금방 나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기뻐하며 음료수를 품에 안고 쏜살같이 병원으로 뛰어갔습니다.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는 자랑스럽게 소리쳤습니다.
“삼촌! 제가 하나님을 사 왔어요! 이제 곧 나으실 거예요!”

다음 날, 세계 최고의 의료 전문가들이 전용기를 타고 이 작은 도시에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와 삼촌의 상태를 진찰했습니다.
아이의 삼촌은 정말로 병이 금방 낫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퇴원할 때 천문학적인 병원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라 쓰러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어떤 억만장자 노인이 이미 비용을 전부 냈다고 말했습니다. 삼촌을 진찰한 의료진도 이 노인이 고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삼촌은 나중에야 아이가 마지막으로 들른 가게의 주인이 억만장자 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노인은 할 일이 없을 때 가게에서 적적한 시간을 보내곤 했던 것입니다.
감격한 삼촌은 아이와 함께 노인의 가게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여행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가게 점원은 이들에게 이번 도움을 마음에 크게 담아주지 말라는 말과 함께 노인이 쓴 편지를 전했습니다.

삼촌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열어봤습니다.
“젊은이,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네.
사실 모든 비용은 자네의 조카가 다 낸 것이니 말일세. 자네에게 이런 기특한 조카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행운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네.
자네를 위해서 1달러를 쥐고 온 거리를 누비며 하나님을 찾아다녔으니 말이야…
하나님께 감사하게. 자네를 살린 건 그분이니 말일세!”

제독의 여자, 엠마 하트

런던에 가는 프랑스 사람들은 좀 약이 오를 것 같다. 트라팔가 광장이니 워털루 역이니 프랑스로서는 아픈 기억들을 지명 삼은 데가 많으니까 말이야. 워털루에서는 영국의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이 나폴레옹을 최종적으로 몰락시켰고 트라팔가는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을 결정적으로 무산시키고 프랑스 해군을 탈탈 털어버린 해전이 벌어진 곳이지. 1805년 10월 21일의 일이었어.

이 전투를 지휘한 넬슨 제독, 이미 전투로 한쪽 팔과 눈을 잃고 이도 대부분 빠져 있던 이 불굴의 노장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최후만큼은 이순신과 비슷하게 장렬해. 그는 총을 맞은 것을 숨기고 전투를 지휘했고 마지막 순간이 오자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한 뒤 숨을 거두니까.

그런데 그 전쟁 이전의 넬슨은 이순신과 좀 많이 달랐어. 물론 이순신도 “밤에 여진과 몇 번을 했다”고 꼼꼼히 적어 놨을 만큼 금욕적인 생활을 한 건 아니었지만 넬슨에 비하면 수도사에 가깝지. 그렇다고 넬슨이 난봉꾼이냐 그건 아니었어. 오히려 한 여자를 지나치게 사랑했다고 볼 수 있지. 엠마 하트라는 여자를. 지나치게라는 말도 모자란다. 미친 듯이.

원레 엠마 하트의 본명은 엠마 라이언. 그리고 결혼 뒤에는 엠마 해밀턴이었던 유부녀였지. 그는 우리 말로 ‘반가(班家)의 따님’이 아니었어, 양반 귀족은커녕 대장장이의 딸이었지. 그나마 일찍 아버지가 죽어서 말할 수 없는 곤궁 속에서 자라났어. 하지만 그녀에게는 꽤 천부적인 미모가 있었지. 3류 배우 생활도 하고 고급 창녀 노릇도 하다가 한 귀족의 정부가 돼. 그런데 이 귀족이 엠마에게 싫증이 났는지 지참금 욕심이 생긴 건지 정식 결혼을 하려고 했고 자연스레 엠마는 사랑스런 정부에서 보기 싫은 혹이 된다. 그렇다고 무정하게 내칠 수도 없어서 그는 엠마를 자신의 삼촌뻘 되는 홀아비에게 보내 버려. 윌리엄 해밀튼이라는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였어.

이 나폴리에서 엠마는 날개를 단다.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와 레옹이 하던 놀이 기억하니? 영화 속 캐릭터들을 흉내낸 의상과 표정과 연기로 그 캐릭터를 알아맞히는.... 마틸다는 섹시한 목소리로 “대통령 각하 생일 축하해요”를 부르는 마릴린 먼로 흉내를 내던. 엠마가 그 비슷한 놀이의 대가였어. 이를테면 클레오파트라 의상을 하고 나와서 연기를 하면서 누군지 알아맞춰 보라는 식. "attitude"라 명명한 이 놀이에 나폴리의 외교관 전부가 홀딱 넘어갔어. 뭐 연기가 훌륭한 측면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속옷을 입지 않고 연기를 했다나 어쨌다나.

그렇게 나폴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엠마는 나폴리의 여왕에게서도 신뢰를 얻었고 자신의 주인(?)이던 윌리엄 해밀튼으로부터는 사랑을 얻어. 해밀턴은 나이를 초월하여 그녀에게 청혼하고 마침내 엠마는 엠마 해밀튼의 새 이름을 얻는다. 대장장이의 딸이자 이 사람 저 사람의 정부로 기구한 팔자를 그리던 여자가 별안간 대영제국의 백작부인이 된 거지.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팔자는 순탄하지 못했어. 1798년 한 남자가 나폴리를 방문한 거야. 바로 호레이쇼 넬슨 함장이었지.

여섯 달 동안 여자를 보지 못하고 바다에만 떠 있었던 처지라 그런지 넬슨도 눈이 번쩍 띄었던 것 같아. 오죽하면 자기 마누라에게 처음 본 여자 칭찬을 이렇게 했을까. “사랑스런 자태와 처신을 지닌 젊은 여인이오. 그녀가 어디에 있던 그녀는 그 곳을 영광스럽게 하오.” 이미 스파크는 일었다고 봐야지.

프랑스군의 침공 위협에 전전긍긍하던 나폴리에 넬슨의 프랑스 함대 대파 소식 (아부킬 해전)이 들려오자 엠마 해밀턴은 거의 기쁨의 패닉 상태가 된다. “이처럼 영광스럽고 완벽한 쾌거는 일찍이 있었을지요. 저는 이 기쁜 소식에 기절할 것 같습니다. 위대한 승리자 넬슨과 같은 땅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러워요. ….. 윌리엄 경과 저는 당신을 어서 포옹하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답니다.” 헹. 웬 남편 끼워넣기 신공. 얼마 후 넬슨이 나폴리에 도착하자 엠마는 실신하듯 그의 품에 뛰어들어. “하느님 이게 정말 현실이겠지요?” 아마 하느님도 입을 내미셨을 거다. "그래 진짜다 이 여자야. 어 눈꼴 시어."

그런데 엠마 하트의 늙은 남편 해밀턴은 이 로맨스를 묵인해. 글쎄 조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질투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넬슨을 비난하지도 않았어. 원래 영국 상류층 사회는 “즐기는 건 좋지만 (배우자에 대한) 로열티는 버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 유부남 제독과 유부녀 외교관 부인은 순식간에 그 불문율을 수채 구멍으로 처박고 만다. 나폴리의 혁명을 피해서 시실리에 주둔 중이던 넬슨과 고령의 외교관 해밀튼은 동시에 소환을 받는데 이때 이들은 영국 해군 배를 타지 않고 육로로 이동해. 그 이유로 영국 해군 병사들이 이 기묘한 세 사람을 태우기를 거부했다는 설이 있더라고. “바람난 제독에 그 정부, 그리고 오쟁이진 남편을 한 배에 태우라고? 부정 탄다 부정 타! 재수없소!”

사랑에 빠진 넬슨은 본부인에게 그럴 수 없이 매정해. (원래 본부인과는 재산 때문에 결혼했다는 설이 있더군.) 애인과의 이별을 요구하는 부인에게 “수입의 반을 줄 테니 꺼지시오.”를 부르짖고는 평생 만나지 않아. 그리고 엠마 하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딴 ‘호레이시아’를 선사하며 (넬슨의 이름은 호레이쇼) 자기 딸이라고 도장을 박지. 놀랍게도 윌리엄 해밀턴은 이 두 사람과 함께 살다가 늙어 죽는다. 엠마 하트는 해밀튼이 병상에 눕자 열렬하게 간호했고 넬슨도 그의 죽음에 슬퍼해 마지 않았다니 도무지 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어.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 둘은 핑크빛 대로가 남았을 것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론이라는 건 무시 못해. 이혼 자체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고. 국왕 조지 3세조차 넬슨에게 “거 배에다 애인 태우고 다니는 건 영웅이 할 일이 아니네!” 하면서 타박을 줬거든. 넬슨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다시 한 번 대승을 거둬 영웅이 된 뒤 축복받으면서 엠마와 결혼하는 거였어. 영국 침략 작전을 기획하던 나폴레옹이 그 제물이 됐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철저하게 때려부순다. 그때 넬슨의 말은 성문종합영어에도 나왔지 아마?
“영국은 제군 모두가 그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그의 의무는 대승이었어. 영국을 위해서. 그만큼이나 간절하게 엠마와 사생아로 남아 있는 자기 딸을 위해서. 저격병의 총을 맞은 뒤 죽어가면서 걱정한 것도 엠마와 호레이시아였지. “I leave Emma, Lady Hamilton, therefore, a legacy to my King and Country, that they will give her ample provision to maintain her rank in life.. 이제 나는 엠마를 떠나야 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 공훈을 세운 만큼 나라는 그녀의 삶에 충분한 보상이 있을지어다.” 넬슨은 진심으로 한 여자를 사랑했고 자신의 공훈을 들먹이면서까지 나라에 자신의 두 여자를 위해 호소했지. 그러나 영국은 예나 지금이나 냉정한 나라. 정식 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엠마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해.
엠마는 영국 최고의 영웅의 피앙세에서 낭비벽 심한 귀족의 미망인으로 복귀했고 그 말로는 뻔한 것이었어. 넬슨 제독은 죽어서도 영국 최고의 영웅이 돼서 수만 명의 배웅을 받으며 성 바오로 사원에 묻히지만 그 애인과 사생아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심지어 돈을 갚지 못해 채무자 감옥에 갇혔다가 넬슨의 친구들이 도움을 줘서 겨우 프랑스로 탈출해서 거기서 죽어가게 돼.

나폴리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시실리만큼 온화하지도 않은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에서 가난 속에 죽어가면서 그녀는 여전히 바다를 보고 있었을 거야. 한때 바다를 누비던 자신의 영웅, 자신이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남자의 잔영을 파도 속에서 자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못말린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부하들마저 혀를 차고 왕도 타박하는 폭풍우 속을 뚫고 나아가던 그들의 사랑의 항해를 추억하며.

ㅡ From 후배 김형민PD

최무룡은 어떤 남자인가

한국 현대사를 살아내린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 소설가가 될 콘텐츠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그 콘텐츠를 풀어낼 능력이 문제지 콘텐츠만큼은 풍요롭고 넘쳐나지. 요즘 다시 tv에 등장해서 반가운 왕년의 톱스타 최민수의 가계(家系)도 그래.

“시골영감 처음타는 기차 놀이라 표를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중년 이상의 사내들만의 노래방에서는 아주 가끔 괴짜 친구의 콧소리로 들을 수 있는 <서울 구경>을 노래한 가수 강홍식이 최민수의 외할아버지고 외할머니는 ‘눈물의 여왕’이라는 평을 들었던 가수이자 배우 전옥이었지. 둘 사이의 딸 가운데 강효선은 아버지와 함께 월북했고 또 다른 딸 강효실은 열아홉 어린 나이에 국군을 따라다니며 위문 공연을 하는 앳된 연예인이었으니까. 그 집안에는 얼마나 기구한 사연이 도사리고 있겠니.

전옥은 그 슬픈 음색으로 ‘눈물의 여왕’ 별명을 얻었지만 그 딸 강효실은 실제 삶에서 눈물의 여왕이 될 운명이었지. 아직 철이 덜 들 나이에 만난 잘 생긴 배우가 그 운명을 열어젖히는 열쇠가 된다. 바로 그가 최무룡이야. 무진년 용띠라서 이름이 무룡(茂龍)이었던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외모 하나는 출중했다고 해. 당시 배우들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그랬듯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은행에 다니기도 했던 그는 연극에 빠지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지. 전쟁 통에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당시 영화계의 실력자 중 하나였던 전옥의 영화에도 얼굴을 디미는데 그 와중에 전옥의 금지옥엽같은 딸 효실과 눈이 맞게 돼. 전옥은 완강히 반대했다지만 누차 얘기했지만 사랑에 빠진 딸이란 황소보다 완강하고 사자보다 용감하며 멧돼지처럼 미련한 법. 둘은 해군 함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강효실 나이 열 아홉 살. 최무룡 스물 세 살.

최무룡은 최고의 배우로서 또 스타의 남편이자 연예계의 실력자의 사위로서 참 잘 나가는 사람이었지만 기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그렇게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었지. 수완은 적었고 연애에는 밝은. 세 딸을 연거푸 낳은 뒤 마침내 아들을 낳았을 때 “영화촬영 도중 강씨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들떠 당장 포도주를 사 갖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을 만큼 최씨는 로맨티시스트였고 부부 사이의 금실이 좋았다”(엄앵란의 증언)지만 그 출산 열흘 뒤에 강효실은 자기 남편이 떠오르는 태양 김지미와 바람 났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으니까 말이야.

이 스캔들 사건 때 강효실이 토해 내는 발언을 들으면 저 저 나쁜 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월 평균 3-40만원 개런티를 받으면서도 (2층 양옥집 값이 160만원이던 시절) 그렇게 10년을 살면서도 저는 저 양반이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를 몰라요.” 김지미와 바람 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영화 <손오공> 해외 로케를 위해서는 강효실이 돈을 빌리러 뛰어다녀야 했고 빚쟁이에 쫓겨 아이들을 친구집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고 하니까. 가히 그 처신을 짐작할 수 있겠지. 그런데 최무룡은 유혹에 관한한 의지 박약의 남자였지.

결국 간통 혐의로 둘의 구속이 집행되는 풍경을 묘사한 신문 기사를 보면 가히 영화배우들다와. “한 쇠고랑에 두 사람이 한 손씩 채워지는 순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웃으면서 서로 손등을 치면서 이에 응했다.... 둘은 찝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서울 교도소로 향했다.” 출산한지 얼마 안되는 강효실이 그 모습을 봤다면 혀라도 깨물었을지 모르지. 김지미가 집을 팔아서 위자료를 대고 최무룡은 강효실과 이혼한 후 김지미와 새로운 삶을 살게 돼.

당대의 여배우들의 목숨 건 사랑을 받은 남자이기에는 최무룡은 너무 약한 남자였던 것 같아. 하는 일마다 죽을 쑤고 벌이는 사업마다 거덜낸 것은 기본이었어. 명배우가 명감독이 된 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그 외 몇 외에는 없다고 하지만 최무룡은 감독 욕심을 냈고 김지미는 열 다섯편의 메이드 바이 최무룡 영화를 지원하느라 허리가 휘었지. 신성일씨가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회고록에 따르면 이런 일이 있었대. 최무룡은 도박에도 빠져 눈이 벌걸 때가 있었다고 하네.

사업 실패 뒤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도박판에서 흐느적대던 최무룡의 행방을 찾아낸 김지미는 남편을 보자마자 이러면 안돼요! 하면서 뺨을 때렸대. 한국 영화사에 손꼽는 여배우이자 대한민국을 뒤흔든 남자들을 손아귀에 쥐었던 여걸다운 카리스마. 기자들 앞에서 혁대 잡고 “이 바지를 내려야 믿겠습니까?” 하던 상남자 나훈아가 “나를 남자로 만든 여자”라고 술회했던 김지미다운 한 방이었지만 김지미는 결정적으로 최무룡에게 실망하게 돼. 신성일에게 했던 김지미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본다.

“미스터 신, 내가 그 다음에 뭘 바랐는지는 알아? 그 사람이 ‘이 여편네야. 새벽에 어딜 찾아와?’라고 소리치며 내 턱이 부서지도록 때려 주었으면 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은 ‘이러면 몸 상해. 밍크 엄마, 진정하라고’ 하지 않겠어. 그때 느꼈지. ‘아, 이 사람은 내가 평생을 맡길 남자가 아니구나’라고 말이야.” ” 보통 여자들은 이럴 때 어땠을까. 친구들 앞에서 아내한테 뺨 맞은 남자는 으레 객기를 부리게 마련이고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화를 내는 게 당연한 판에 되레 자기를 걱정하는 남편에게 한 수 죽지 않았을까? 하지만 김지미는 자기 턱에 주먹을 날리지 않은 남자에게 정을 떨어뜨리고 있네. 남자도 다양하지만 여자도 각양각색.

김지미는 ‘오발탄’에 등장하는 형형한 눈빛의 야생마같은 청년에게 반했는지도 모르지. 입 꽉 다물고 눈 부라리면 작렬하는 카리스마에 자신이 반으로 접히는 느낌을 기대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외양과는 달리 최무룡은 카리스마를 연기할 줄은 알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발휘할 줄은 모르는 심약한 남자였던 거고. 그렇다고 기가 죽기엔 너무 잘난 남자라 밑 빠진 독 주제에 계속 물을 부어 달라고 보챌 줄 아는 남자였던 거고. 결국 김지미가 두 손을 들었을 때 최무룡은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기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글쎄 최무룡이 “남자가 하는 일에 여자는 따라올 줄을 알아야지! 돈 가져와!” 하면서 김지미의 뺨을 때렸으면 김지미는 남아 있었을까? 그러기에는 3천만원의 빚이란 어마어마했지. 최무룡 자신 “이혼하면 나 하나만 죽는다. 지미까지 죽을 수는 없지 않나.”고 했다니.

그 뒤로도 최무룡은 두 번 더 결혼해. 한 번은 미국 체류를 위해 재미교포와의 서류상 결혼이었다고 하고 마지막에는 무슨 재벌 그룹의 미망인과 살림을 차렸고 그 부인이 최무룡의 빚을 청산해 주는 은덕을 베풀지. 하지만 최무룡은 그 능력 탓이든 시대적 한계 탓이든 밑 빠진 독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어. 끈질기게 영화 감독에 도전했지만 여의치 않았어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좌지우지하던 새마을운동본부와 손잡고 만든 계몽 영화 비슷한 <이 한 몸 돌이 되어>는 그야말로 망해 버렸지. 거기에 재벌 그룹 차원에서 미망인에게 “저런 남자하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류의 압력이 들어갔고 최무룡은 또 한 번 짐을 싸들고 나오게 돼. 모르지. 그때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면서 표표히 대문을 나섰는지도. 그 후 그의 인생도 파란만장했지. 국회의원도 됐지만 사기범으로 감방도 경험했다면 더 말할 게 뭐가 있겠니.

1999년 11월 11일 세상을 등졌던 날을 기억하는 게 나는 그때 어떤 프로그램에서 마침 그 아들 최민수가 등장하는 부분을 편집하고 있었어. 어 이 양반 아버님이 돌아가셨군 하면서 내가 그를 기억하는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오발탄>을 떠올렸지. 한국 전쟁 상이군인. 세상을 향해 온갖 불만을 터뜨리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은행을 털고 청계천 지하를 달리던 젊은이를 말이지. 참 그 눈빛 멋졌었는데. 온갖 잘난 여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만 그걸 간직할 수는 없었던 사나이. 하지만 그 사랑을 이용해서 등을 칠만큼 못되지는 못했던 남자. 최무룡은 행복한 남자였을까? 불행한 남자였을까?

ㅡ From 후배 김형민PD

슈베르트의 슬픈 사랑

‘사지선다’가 전 과목에 적용될 무렵을 떠올려 보면 모든 과목이 그랬지만 특히 음악이나 미술은 정말 가관이었던 것 같아. 미술? 남종화 북종화가 그 그림은 본 적도 없으면서 그 유파의 특징이며 대표 화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고낭자사인신후’의 주문도 머리에 남아 있네. 뭐냐고? 아 고전파 낭만파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의 시대순을 담은 주문이야. 음악도 마찬가지였지. 바부헨모모신베성베슈가 이건 뭔지 알아?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父) 헨델 음악의 어머니(母),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악성 베토벤 이런 식으로 외우는 주문이었지. 너희처럼 머리만 좋은 애들에게는 좋았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각설하고 오늘은 음악가들의 별칭 주문 중 ‘슈가’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슈베르트 가곡의 왕이라는 뜻이야. 나는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 아닌데 종종 귀에 깊숙이 틀어박히는 멜로디들이 있어. 나는 음악 시간에 배웠던 ‘보리수’의 멜로디를 처음 듣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노래를 배운 뒤 성량이 좋아서 소풍 가면 카수 1순위로 불려나갔던 녀석이 부른 ‘보리수’의 가락은 그 가사와 관계없이 운동장 한 가운데 보리수가 서 있고 그 그늘 아래 누군가 걸터앉아 그리운 사람을 부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지.

그렇듯 참 귀를 잘 간질였던 ‘내 귀의 슈가’, 다른 거장들보다는 훨씬 친절한 음악세계를 우리에게 선사해 준 슈베르트의 생애는 그렇게 달콤하지 못했어. 우선 그는 심각한 추남이었어. 초상화에 보면 웬만큼 생긴 걸로 나오지만 그건 그 시대의 ‘뽀샵질’이었고 그는 키 152센티미터로 군대에서도 안받아주는 땅딸보였고 머리는 큼직한 배불뚝이였지. 여자들이 별로 상대해 주지 않았으니 친구와 함께 음침한 사창가를 즐겨 찾는 엉큼함도 있었고.

하지만 슈베르트에게도 아픈 사랑이 있었지. 그건 테레제라는 이름의 여자였어. 한창 왕성하게 작곡 활동을 하던 슈베르트는 어느 날 어릴 적부터 자신을 아꼈던 음악의 스승의 80회 탄신 기념 음악제를 준비하고 있었어. 근데 독창자가 펑크를 냈네? 그때 한 처녀가 나타나 말하지. “슈베르트씨 제가 그 역을 맡으면 안될까요?” 앗 당신은? 몇 년 전 작곡만은 안된다며 방방 뜨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더 할 거면 부자의 연을 끊자!”는 선언을 듣고 허허로이 방황할 때 자신을 위로해 준 소녀가 그 앞에 서 있었던 거야. 그녀의 노래는 훌륭했고 성황리에 음악회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해.

슈베르트는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어.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말 안듣는 아들을 두 번이나 내쫓았고 어머니가 임종할 때 ‘프란츠! 프란츠를 불러 줘요’라고 애타게 외쳤지만 끝내 슈베르트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고 해.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 집에 도착한 슈베르트는 미친 듯한 슬픔으로 다락방에 올라가 울먹이며 노래를 지었고 이게 슈베르트의 '자장가'지. 즉 아이를 위한 자장가가 아니라 자신을 정답게 재우던 어머니에 대한 추모곡이었달까? 그래서 유난히 슈베르트의 자장가는 슬프잖니. 베토벤의 자장가는 무슨 가곡같고 모차르트의 자장가는 경쾌한 왈츠같은데 말이지. 우리 음악 교과서로는 이렇게 끝나는 자장가. “하느작 하느작 나비 춤춘다....”

이 외로운 남자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 사랑의 열기 속에 그는 무슨 가곡 생산자같이 가곡을 생산해 낸다. ‘마왕’이며 ‘소녀의 탄식’ ‘달에게 부침’ 등 144곡을 쏟아냈으니 무슨 가곡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그의 뇌 속에서 돌아가고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 컨베이어 벨트는 대량생산한 싸구려 포드가 아니라 람보르기니급의 수제 차량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말이지.

그 가운데 <들장미>라는 노래 있지. (우리가 아는 <들장미>와 가사는 괴테의 詩와 같은데 곡은 다른)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피이~~인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그 향기에 탐나서 아낌없이 보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피인 장미화” 하는. 이 노래는 사실 슈베르트의 아픈 사랑을 담고 있단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아버지와의 불화로 방황할 때 “프란츠 당신은 뛰어난 분이에요” 하면서 꽃다발을 묶어 준 그 소녀를 생각하며 노래를 지었지. 들장미 테레제를 정신없이 들여다보는 웬 아이는 어쩌면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테레제는 꽤 대담하고 거침없는 아가씨였던 것 같아. 후일 그렇게 존경하는 베토벤을 만나고도 베토벤의 늙고 병든 모습에 충격받아 아무 말 못하고 뛰쳐나온 소심남 슈베르트와는 달리 말이지. 슈베르트가 <들장미> 악보를 선사하자 슈베르트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를 먼저 부르짖을만큼 말이지. 슈베르트가 조금만 더 박력있게, 자신감 있게 다가가서 그 부모에게 “따님을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부르짖었다면 혹시 모르겠는데 하는 일이라고는 콩나물 그리는 것 밖에 모르고 무슨 말을 해 보라면 우물쭈물이 일쑤인 이 헝클어진 머리의 남자에게 어느 부모가 딸을 덥석 맡겨.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면 그때 보세.” 했지만 결국 테레제는 제과공에게 시집가고 말지. 세상에 이 아가씨 자기 청첩장을 주면서 피로연에 자신을 위한 노래까지 작곡해 줄 것을 부탁했다는데 이걸 대담하다고 봐야할지 뻔뻔하다고 봐야 할지. 슈베르트의 첫사랑은 그의 인생을 결정해.

“나는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가 한 사람 있었죠. 그녀도 나를 많이 사랑해 주었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깊은 감정을 넣어 노래하는 사람이었죠. 얼굴이 조금 곰보이고, 미인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여자였죠. 그녀는 나와 결혼하려고 3년이나 기다렸지만 나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능력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것입니다. 그 뒤로 나는 그녀 이상으로, 아니 그녀를 사랑한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단 그녀와 헤어진 뒤 슈베르트는 술꾼이 됐고 술 앞에 장사 없다고 어릴 적 괜찮았던 외모는 끔찍한 수준으로 망가져 갔고 몸도 만신창이가 됐어. 친구 쇼버가 그 외로움을 달래 준다고 들른 사창가에서는 매독을 얻었고 그 여파로 삭발을 하고 가발을 쓰고 다녀야 했지. (더 방탕하게 산 쇼버는 그런 병 없이 무병장수했는데.....) 사랑의 기회가 있었지만 대부분 걷어채이거나 스스로 포기했어. 그 슬픔 속에서 슈베르트는 계속 ‘슈가’같은 노래들을 창조했으니 어쩌면 이 또한 사랑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슬픔은 때로 인간에게 인간이 낼 수 있는 에너지 이상을 내게 하지. 슈베르트의 음악에 홀리면서도 그 뒤켠에 숨은 그의 한숨에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거야.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의 슬픔의 표현이다. ” 여기까지는 들어 줄만 해. 하지만 다음 말에서는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신은 인류에게 그의 음악을 선물하기 위해 슈베르트를 이렇게 슬프게 살게 했을까 싶은 맘이 들 정도. “슬픔으로서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굳세게 해준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만년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슬픔도 힘이 되더라구요.” 하면서 허허허 웃었을지 모르나 그는 서른 한 살의 나이에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죽었지. 그 나이에도 물론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편수의 작곡을 했지만 말이야. 슈베르트 정도가 된다면 실연도 경험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최백호 선배님 말씀대로 “실연의 달콤함도 없는 이제와 새삼 이 나이”가 됐지만 말이야.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1830년 11월 19일 죽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

아픔은 사랑을 담는 그릇

우리는 외로움과 실패, 실수와 아픔들, 눈물과 상처들이 모여 아름다운 꽃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아픔들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긍정의 씨앗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멋진 삶으로 나아가지만, 반대로 그것을 저주로, 그리고 환경과 남탓으로 돌릴 때 더 슬픈 인생으로 점철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픈 세상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은 그 아픔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내공을 길러서이겠죠.

어제 저는 자살하려는 사람이 영원히 떠나겠다는 톡을 받고, 전화도 안받고 톡도 안보고 해서, 경찰에 신고하고, 출동하여 살았습니다. 취업도 잘 안되고, 남친과 헤어지고 나니 삶의 의욕은 없고, 세상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저녁을 사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밥은 안먹고. 내내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제도 해결되는 것 같고, 속도 편하다고, 너무 작은 일에 자기가 집착했던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상이 선생님처럼 따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다시 힘을 내겠다고 합니다.

모두가 힘들고 아픈 세상에 우리가 손을 잡아주는 그런 따뜻한 세상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만들었으면 합니다.

꿈! 느끼고 적고 실천한다!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적고
발로 뛴다! - 존고든 -

머리로 배운 지식을
가슴으로 느끼게 되면 감동이 밀려오고,
그 감동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기록하고,
가슴으로 공감하고, 이해한 것들을 발로 뛰며 실천한다.

그런데 머리에 들어온 지식을 간과하면
지식은 잊어버려 메마른 가슴만 남기고,
삭막하고 각박한 세상에 감동하나 없으니
방황하는 영혼은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다.

느끼는 것도 없고, 적을 것도 없고,
실천할 것도 없는 인생의 삶속에
단 하나를 하지 않는데 어찌 꿈을 이루겠는가?

그러나 꿈이 있는 영혼은 지식을 찾으며,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 감동을 주고,
감동은 오래도록 기록으로 향기를 발하며,
생의 매순간 아름다움으로 행복을 나눈다.

하나씩 실천하며 길을 걸어가면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순간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눈으로 목도한다.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사람들을 보실때 어떤것이 가장 신기한지요..?
신이 대답했습니다.
"어린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 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 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신이 나의 손을 잡았고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습니다

도서, 책, 그림, 그림책, Picture book, Drawing, Art, 국내 최고의 만화책 그림책 창작 그룹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앞으로 펼쳐질 아름답고 위대한 영웅들의 모험담을 즐겨보자!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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