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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밑에선 봉선화(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1941년 8월 30일 홍난파(洪蘭坡)가 죽었다. 그의 본명은 후(厚)자 돌림의 홍영후고 난파는 아호인데 그 아호를 지은 사람은 홍난파 본인이나 친구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 국악에 조예가 깊었고 악기를 잘 다뤘던 아버지 홍준은 풍류객답게 아들들에게 금파(錦坡 :비단 언덕)니 난파(蘭坡 )니 하는 호를 내려 줬다고 한다. 거기에 아버지는 한글 성서 번역에 관여할 만큼 일찍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선교사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이기도 했다.  고향인 경기도 남양을 떠나 서울로 온 뒤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며 홍난파는 서양 음악의 세례를 받게 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새문안 교회에서 홍난파는 성가대를 하고 바이올린을 배웠다.    


 1897년생인 홍난파가 스물 세살 되던 1919년. 이 해에 일어난 3.1항쟁은 수많은 청춘들의 인생을 바꿔 놓거나 최소한 지워지지 않는 지억을 남기게 된다.  그즈음 홍난파는 동경 유학 중이었다.  그는 2.8 독립선언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자기 몸보다 애지중지했던 바이올린을 저당잡혀 마련한 돈으로 독립선언문을 찍어내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한다. 이 이력으로 인해 홍난파는 불령선인으로 찍혀 향후 진학 등에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천상 예술가이지 투사는 못되었다. 1931년 나이 ‘서른 즈음’의 홍난파가 쓴 글을 보면 일종의 애늙은이의 회한(?) 같은 게 느껴진다.  “부형(父兄)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학자(學資)까지 대어주며 공부시키는 것을 다소곳이 달게 받았던들 연희전문학교를 제 1회로 졸업했을 것이요, 세브란스를 그대로 꾹 참고 계속만 했더라도 지금쯤은 의학박사 한 개는 갈데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처럼 들어갔던 동경 음악학교만 하더라도 만세통에 튀어 나오지만 않았던들 관립학교란 큼직한 간판 밑에서 대도 (大道)를 횡보(橫步)했을 것이요. 일본대학 문과를 2년만 더 다녔더라면 문학사란 훌륭한 미서(眉書)를 명함 꼭데기에 박아가지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1931년 2월 20일 조선일보 ‘유모레스크’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세브란스 의전에도 적을 두었고 (그의 가문에는 의사가 많다) 천성이 끌리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가 ‘만세통’을 만나 튕겨 나와 버렸고 일본 대학 문과도 독립운동 이력 등으로 인한 눈총 때문에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니 그의 20대도 참 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스물 셋이었던 1920년,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노래 멜로디를 짓는다. <봉선화>.  


 1919년의 질풍노도는 수천 명의 희생과 결단을 낳으며 잦아들었다. 바이올린을 저당잡혀 가며 독립운동에 열을 올렸던 홍난파 역시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만세 부르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비명도 귀에 쟁쟁했으나 일본 경찰이 칼 휘두르는 슁슁 소리에 자라목도 됐을 것이다. 그렇게 만세 부르며 일어섰으나 별로 바뀐 것도 없이 기세 좋게 휘날리는 일장기를 바라보며 슬픔에 젖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그는 바이올린 연주곡 하나를 짓고 <애수>라 이름 붙인다. 그 몇 년 뒤 홍난파는 이웃에 살던 시인 김형준에게 가사를 의뢰하게 된다.  김형준의 집에는 봉선화가 만발했고 그는 꽃들을  바라보며 “참 우리 민족 같은 신세군” 같은 한탄을 곧잘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사에는 그런 한스러움들이 곳곳에서 물들어 번져난다. 노래의 3절을 특히 주목해 보시라.   

 

울밑에선 봉선화(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북한에서도 이 노래를 부르고 음악 시간에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노래와 홍난파에 얽힌 또 다른 전설까지 전하고 있다.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홍난파는 고향에 내려갔는데 울적한 심사를 달래고자 바이올린을 켰다. 그런데 이웃에 살던 봉선이라는 처녀가 찾아온다.  “오빠 바이올린 소리도 이제 다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곡조 들을 수 있을까요?”  홍난파에게 글을 배웠고 노래를 익힌, 홍난파를 오빠처럼 따르던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무너진 집안을 먹여살리기 위해 방직공장에 팔려 가야 한다고 했다. 


 봉선이는 이름처럼 봉선화를 유달리 좋아했고 해마다 봉선화 꽃물을 들이며 홍난파에게도 자랑하곤 했었다. 또 자기집 뜰에도 홍난파의 울타리 아래에도 봉선화 꽃씨를 뿌려 철이 되면 봉선화가 만발하도록 했었다.  “이제 오빠를 언제 볼지도 모르겠어요. 나를 위해 바이올린 한 번 켜 주세요.”  


홍난파는 바이올린에 활을 갖다 댔다. 그녀가 익히 아는 노래를 들려 주려고 활을 움직이는데 울컥 하면서 새로운 악상이 머리를 스쳤다.  열 일곱 살에 공장에 팔려가야 하는 슬픈 소녀. 그녀에게 들려주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바이올린.  홍난파의 어깨는 머리 속에 흐르는 악상에 따라 흐느적거렸고 손가락은 그때껏 없던 지점들을 짚었다. 그게 연주곡 <애수>였다는 것이다. (북한 라디오 대담을 소개한 연합뉴스 2001/05/31, 정상용 기자)


 남쪽에선 들어본 적 없는 북한의 전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봉선화>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보면 눈물 그렁그렁한 봉선이가 노래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고, 자신이 심어놓은 봉선화 꽃들을 어루만지고, 아직 꽃물 가시지 않은 손톱을 바라보고, 기약 없는 이별을 고하며 마지막 바이올린 감사한다고 허리 깊숙이 숙인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까지,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눈앞을 스쳐가게 된다.  김형준에게도 이 얘기를 들려 주었던 것이 아닐까. “김형. 그때 그 봉선이가 말이요.........” 


 이 노래는 오히려 홍난파의 다른 노래에 비해 뒤늦게 퍼진 노래다.  1940년 소프라노 김천애가 일본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 것이 레코드로 취입되면서 히트를 친 것이다 열에 여덟 아홉은 봉선이와 다를 처지가 아니었을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과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에 공감하는 중늙은이들,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며” 독립을 꿈꾸던 의지의 조선인들까지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 것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처지를 각자의 노래에 실었다고나 할까.  


 1948년 10월 제주도 출동 준비 중이던 14연대에서 반란의 총성이 울렸다.  군내 좌익들의 봉기였다. 여수와 순천이 좌익들에게 점거되고 한국 정부군이 다시 좌익들을 소탕하고 여순 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  봉기한 좌익은 우익들을 잔인하게 솎아냈고 우익들은 갑절로 그 피를 갚았다. 이 와중에 좌건 우건 아니면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람들이건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갔다.


 여수를 장악한 좌익들은 우익 인사들을 끌고 와 처형할 채비를 갖춘다. 무슨 조화인지 좌익 봉기군 하나가 “죽기 전에 노래 하나씩 해 보라.”고 말을 건넸다. 그때 우익 항만노조 조직위원장 김창업이 담담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장강뉴스 , 이형문 작가가 겪은 여순사건)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산 채로 불에 태워질지 총에 맞을지 죽창에 찔릴지 도무지 앞길이 캄캄하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불렀고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그리고 다 죽었다.    


 좌익들의 시간은 며칠 가지 않았다. 이제는 진압군의 시간이었다. 해군까지 동원된 대한민국 정부의 반격은 압도적이고도 냉혹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우익들의 눈에도 핏발이 섰다. 좌익세가 강했던 순천 지역 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은 폭도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 와중에 인기 많고 다정했던 순천여중 음악선생 김생옥이 걸려든다.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끌고 가서 총알밥을 안기는 상황에서 김생옥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김생옥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당시 순천여중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노래를 들은 진압군 장교가 총살 중지를 명령하려고 손을 휘젓는데 병사들이 사격 개시로 알고 쏘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KBS 뉴스 2020년 5월 15일) 


 김생옥 선생이 가르쳤던 순천여중 7기생들은 반란과 전쟁의 소용돌이 와중에 학적부가 사라지고 불타 재학 사실 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끈질기게 동창회(?)는 가졌고 그때마다 그 모임의 말미에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부르며 다정했던 선생님을 기렸다고 한다. 그 노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1941년 8월 30일 홍난파는 임종하면서 연미복을 입혀 달라고 했다.  끝까지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게 여의치 않자 연미목을 입힌 채 화장해 달라고 한다. 음악인으로서의 열정은 사뭇 대단했던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민족 의식‘은 그렇게 투철하지 못해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는 친일로 돌아서고 친일 노래도 작곡하여 친일파라는 낙인이 이미 부과돼 있기도 하다. 


그의 친일 이력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 어느 행사에서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넣은 데 대해 “친일파의 노래를!!”이라며 분노하는 이들을 보면서는 혀를 찼다.  <봉선화>는 홍난파만의 노래가 아니며 수많은 ’봉선이‘들의 노래였고, 좌익의 손에 죽는 우익과 대한민국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하는 좌익(으로 몰린) 교사의 노래였던 것을.  어떻게 80년 뒤에 사는 사람이 그렇게 칼로 두부 썰 듯 역사와 노래를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홍난파가 친일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보탤 마음이 없다. 친일행각은 명백히 밝혀서 기록으로 남기면 될 것이다. 단 그가 친일파든 아니든 그의 노래는 우리 역사와 문화의 일부다.  친일파여서 그 일부를 지운다면 이는 우리가 경멸해마지않는 문혁(文革)의 일원이 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From 김형민PD (SBS CNBC)

 < 난파의 노래를 돌아보며 >

ㅡ 1941년 8월 30일


발트 3국 사람들은 공히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길 즐긴다고 한다

언젠가 올림픽 개막식을 시청하면서 러시아 선수단이 입장할 때 가볍게 놀란 일이 있다. 그건 러시아의 인구 수가 1억 5천만으로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러시아가 왜 인구가 저것 밖에 안되나 싶었던 것이다. 일본과도 대차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러시아를 왕년의 ‘소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 영어로는 USSR로 표기하고 러시아어로는 CCCP로 표기되던 소비에트 연방. 왕년의 ‘소련’의 인구는 미국과 비등했고 근 3억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러시아’의 인구가 겨우(?)  1억 5천만이었으니 잠깐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1991년 3월  폭주하는 민주화 열망과 각 공화국들의 저항 속에 기진맥진한 소련 당국은 소비에트 연방 유지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그러나 소련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중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발트 3국과 몰도바 등 여섯 공화국은 참여를 거부했다. 


소련 최고 회의는 “이 투표를 방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여섯 공화국에 경고를 보내는 한편, 과거 소련 공산당의 중앙집권적 통치 아닌 “동등한 주권 공화국들의 새로운 연방”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로 각 공화국들을 끌어들이고자 애쓴다. 어쨌든 단일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이 국민투표가 70년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는 사실은 소련이라는 정치적 체제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반증한다.


 이 역사적 투표의 결과는 뭐라고 딱 한 마디로 묘사하기 힘들다. 전체적으로는 연방 찬성표가 더 많이 나와 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어깨에 힘이 실리나 했지만 모스크바나 레닌드라드 등의 대도시에서는 반반이거나 오히려 반대표가 많았고 우크라이나의 경우 전반적으로 찬성 비율이 높은 가운데 키에프 같은 대도시에서는 반대가 우세했던 것이다.


 이 불안한 국민투표를 통해 재출발한 소비에트 연방은 5개월 뒤 소련의 극단적 보수파 (군부와 KGB)가 일으킨 엉성한 쿠데타를 겪으면서 결정타를 맞고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 기울어가는 소련 당국이 국민투표가 끝나자마자 했던 행동 중 하나는 발트 3국 중의 하나이자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 리투아니아의 국방 장관을 체포했다가 수 시간만에 풀어준 것이었다. 소련 당국은 어떻게든 발트 3국을 연방 안에 묶어 두기를 원했고 세 나라 국민들의 국민투표 보이콧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트 3국 국민들은 완강했다. 그들은 유라시아를 뭉뚱그린 거대한 연방 내 공화국의 국민이 아니라 작지만 주권을 가진 국가의 국민임을 재천명했다. 그들은 주장했다. “우리는 2주일 전에 국민투표를 했다.”


 소련의 국민투표보다 조금 앞서 실시된 연방 탈퇴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발트 3국 국민들은 80퍼센트가 넘는 찬성표로 자신들의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소련의 고르바초프도 이미 이들의 독립 열망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 동유럽 국가 수준”의 독립 허용을 시사한 것이다. (1991.3.22 슈피겔과의 회견 중)  이미 흘러간 물이었고 지나간 버스였지만.  


 발트 3국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방죽이 무너지는 계기를 만든 작은 구멍이었다. ‘발트3국’이라고 묶어 말하지만 사실 세 나라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상이한 배경을 지닌다. 에스토니아는 핀란드 쪽과 더 가깝고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영향으로 가톨릭이 우세하다. 리투아니아는 독립의 지위를 누린 적이 있으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1918년 러시아 혁명 후에야 독립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기구한 운명의 나라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다시 소련의 먹잇감이 된 것은 1939년 리벤트로프 몰로토프 조약, 이른바 ‘독소밀약’ 때문이었다.


 서유럽 정복의 야욕을 불태우던 히틀러는 동쪽의 붉은 곰 러시아를 회유해야 했고 그 댓가로 소련의 몫으로 ‘양해’한 것이 발트3국과 폴란드 동부 등의 땅이었다. 자신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발트3국은 갑자기 들이닥친 소련군의 낫과 망치의 깃발 아래 50년을 살아야 했다. 우리로 치면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발트 3국에서는 독립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였다. 1987년 에스토니아의 수도 리가에서 “스탈린에 의해 죽어간 이들의 추모식”이 열리고 소련 당국에 대한 저항이 표출된 후의 발트3국의 역사는 소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3국과 그를 막으려는 소련의 줄다리기의 연속이었다.  이 줄다리기 와중에 발트 3국 국민들이 보여준 독립 의지의 결정체는 1989년 8월 23일 이른바 리벤트로프 몰로토프 조약, 독소불가침협정 50주년에 일어난다.  


 발트 연맹을 결성한 발트 3국의 정치인들은 반세기 전 3국을 스탈린의 마수에 떨어뜨렸던 날을 기하여 하나의 황망하기까지 한 행사를 기획한다. 독소밀약을 통해 소련이 발트3국을 불법 통치해 왔음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라는 시위였다. 시위 방식은 다름아닌 ‘인간띠’였다.


 소련 관영 타스 통신이 “불법 행위 엄단”을 연일 방송하고 그때까지는 살아 있던 루마니아의 독재자 (넉 달 뒤에 민중봉기로 총살당하지만)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 군을 동원하여 소련을 돕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으스스한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그 봉화가 올랐다. 


 탈린 시민들은 수십 년간 내보이지 못했던 국기를 들고 역시 오랫 동안 부르지 못했던 노래 <나의 사랑 나의 조국>, 부르기만 하면 시베리아 행이 확실했던 불온한 에스토니아 국가를 부르며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인간띠와 노래는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로 이어졌다.  


 발트 3국 사람들은 공히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길 즐긴다고 한다. (음 동이족인가)  두어 해 전 <나의 아저씨>에서 구성지게 흘렀던 <백만 송이 장미>는 라트비아에서 나온 노래다.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이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초바의 노래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실과 다르다. 원래 이 노래는 라트비아 작사가 레온스 브리에디스, 작곡가 라이몬츠 파울스가 만든 ‘마라가 준 인생’이 원곡이다. 1981년에 한 방송사에서 주최한 음악제에서 우승한 노래를 알라 푸가초바의 목소리로 녹음한 것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가사 역시 라트비아어로 만들어진 마라의 인생과 고난을 담았지만 러시아어로 개사된 노래에서는 가난한 화가와 여인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한겨레신문 2019,6,28, <책과 생각] 황우창의 어디서든, 음악)  


인간띠를 이은 라트비아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불렀으리라. ‘마라’의 인생과 라트비아의 역사를 머리 속에서 뒤섞으면서.   


 도시의 경계만 벗어나면 황량한 평원으로 이어지는 그 길목 길목에 발트 3국 국민 200만 명이 모여들었다. 서로 언어와 문화가 달랐지만 비슷한 역사를 함께 한 그들의 마음과 목소리는 오직 이 한 단어만을 벅차게 부르짖고 있었다. '라이스베스(laisves- 리투아니아)', '브리비바(briviba-라트비아)', '비바두스(vabadus-에스토니아)'라고 외쳤다. 그것은 모두 ‘자유’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손이 이어진 길은 무려 600킬로미터. 발트 3국민들은 그 외침으로 공산주의 전제 통치의 종식의 신호탄을 쏘았다.


 이 인간띠 시위는 소련 내 각 민족들을 들쑤셔 놓았다. 소련은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등 연속된 민족 분규에 시달렸고 공산주의의 철권 통치는 점점 주먹에 힘을 잃어갔다. 앞서 언급했듯 소비에트 연방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는 목적으로 소비에트 연방 최초의 국민 투표를 실시했을 때 그에 바로 앞서 3월 3일 “독립 찬반 투표”를 결행하여 결정적으로 김을 빼 버린 것도 발트 3국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독립을 쟁취했다. 


 노래 좋아하는 발트 3국 가운데에서도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노래 사랑은 지극하다. 5년 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지는데 5년마다 열리는 에스토니아 대합창제 ‘라울루피두’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수만 명이 모여들어 거대한 ‘떼창’을 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거니와 이 합창제의 피날레는 제 2의 국가(國歌)라 할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다.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

 애정을 바쳤던 그대에게

 노래하노라. 위대한 행운을

 생기발랄한 에스티여.”


 아마 오늘도 발트 3국은 노래 소리로 떠들썩할 것이다.  우리는 노래 논쟁으로 시끄럽지만.  사실 많은 나라의 국가(國歌)는 ‘공식적으로’만 불리는 경우가 흔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서 함께 부르는 ‘제 2의 국가’가 많다. 미국인들이 <성조기여 영원하라> 가사는 잘 못 외워도 <America is the beautiful>에 더 열광하듯이.  에스토니아 합창제가 <나의 조국 나의 사랑>으로 마무리되듯이. 국가(國歌)는 그렇다고 치고 우리나라에는 도시 <아리랑> 외에는 전 국민이 합창할 노래가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아 대한민국>은 전두환 냄새나서 진저리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인구의 1/3은 돌아앉을 것이고, “동방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으로 시작하는 김동진 작곡의 노래도 뭔가 닭살이고, <내 나라 내 겨레>는 대중성이 부족하고 <아름다운 강산>은 가사 외우기 어렵다.  떠오르는 건 <대한민국 헌법 1조>인데 뭔가 감수성이 떨어진다.  <아침이슬>이 그나마 근접해 있을 것 같긴 하다.  역사적으로 

 가무음곡 좋아했던 우리 민족에게 왜  '거리낌없이 다 함께 부를' 노래가 적을까..... 발트 3국 노래 혁명의 날 노래에 대한 상념에 젖어 끄적인다.   



From 김형민PD (SBS CNBC)

 < 발트 3국 노래의 길 >

ㅡ 1989년 8월 23일


인간의 몸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그림이다. - 비트겐슈타인

 1889. 4. 26 빈~ 1951. 4. 29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의 철학자. 1925~50년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논리학 이론과 언어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다.




1. 쓸모없는 문제에 관여하지 마라.

2.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3. 언어는 만물의 척도다.

4. 생각도 일종의 언어이다.

5. 말에는 음악이 깃들어 있다.

6.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7. 우리는 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싶어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아름답게만 간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8.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의 극복이 칭찬받을만한 것이고, 인생을 보람차게 만든다.

9. 마음속 용기야말로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작아도 점점 성장해서 거목이 되는 것이다.

10. 어떤 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도저히 손을 쓸 방도가 없다면 먼저 주변의 돌부터 움직여라.

11.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서 온다.

12. 철학자란 건강한 인식을 얻기 위해서 자기안에 박혀있는 다양한 사고의 오류를 고쳐야 하는 사람이다.

13. 반대되는 결론도 항상 함께 생각하라.

14.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고뇌하고 인내하는 능력을 누르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15. 생활이 자꾸만 변화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물론, 그것은 습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6. 나는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단지 즐기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17.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에 자신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은 철학자의 주요한 기술중 하나이다.

18. 자아성찰은 내 삶의 새로운 한 부분이어야 한다.

19. 의심은 믿음 이후에 온다.

20. 확실하다는 말로써 우리는 완전한 확신, 의심의 부재를 나타내며, 또한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의 그 믿음은 주관적 확실성임을 알아야한다.

21. 인간의 몸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그림이다.


22.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기란 어렵다.

23. 인생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때, 우리는 상황이 변화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변화, 즉 자기자신의 태도를 바꿔야한다는 인식에는 거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24.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나도 단순하고 친숙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가는 것 중에 있다.

25. 나는 구두점을 많이 써서 읽는 속도를 늦춰보려고 하는 편이다. 내가 쓴 글이 천천히 읽혀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읽는 것처럼 ...

26. 철학적 탐구는 인간생활에 보탬이 되는 쪽으로 국한되어야 한다.

도서, 책, 그림, 그림책, Picture book, Drawing, Art, 국내 최고의 만화책 그림책 창작 그룹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앞으로 펼쳐질 아름답고 위대한 영웅들의 모험담을 즐겨보자!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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