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농 김상현 의원을 추억하며
SNS가 의외로 조용하다. 6선 의원이었던 후농 김상현 의원이 별세했는데 애도나 감회를 표하는 포스팅이 적다. 개인적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그만한 생명력을 지닌 정치인도 흔치 않았다고 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읊으며 유연한(?) 정치 이력을 통해 선수(選數) 쌓은 정치인은 많지만 김상현은 그런 이들과는 좀 종류가 다른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은 비포장에 돌밭길로 점철돼 있고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한다.
그의 호 ‘후농’(後農)을 지어 준 사람은 요즘 생애 최대의 위기에 처한 고은이다. 19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감방 동기가 됐던 고은이 그에게 호를 지어 주겠다 해서 건넨 호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인생 내내 고생만 하고 희생타만 쳤으니 인생 후반엔 농사 잘 지어서 좀 많이 거두고 살아라는 뜻이었단다. 그런즉 그때까지 그의 삶이 어떻게 비쳤는지 알만하다.
전쟁통에 어머니 잃고 아버지도 나이 열 넷에 돌아가셨으니 일찌감치 하늘이 무너진 셈이고 두 손 부르쥐어 봐야 땀밖에는 쥘 것이 없던 팍팍한 인생이었다. 구두닦이부터 허드렛일까지 하며 발버둥쳤지만 야간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에 뜻이 있었다. 그래서 웅변학원도 등록했는데 그 학원 부원장님의 함자가 김대중이었다.
부원장님이 강원도 인제 보궐선서에 출마하자 웅변학원생 김상현도 강원도 인제로 출동하여 열렬히 선거운동을 한다. 김대중 후보는 당선됐지만 5.16 쿠데타로 초단기 국회의원으로 첫 의원직을 마감한다. 김상현도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이후 김상현 역시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첫 금배지를 단다. 나이 스물 아홉 때 일이었으니까 역대 최연소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26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지간히 젊은 나이에 금배지를 단 셈이다. 그 후 계속 국회에 등원했으면 아마 김영삼 대통령의 9선이나 서청원, 이만섭 의원의 8선 정도는 거뜬히 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그의 등원 기록을 보면 6,7,8 3선을 한 뒤 바로 14대로 건너 뛴다. 8대 총선은 유신 직전인 1971년에 치러졌고 14대 총선은 1992년이었다. 무려 20년 동안 ‘업자’로 지낸 셈이다. 그 사이 5년은 감옥살이를 했고 집안에 갇힌 건, 즉 가택연금을 당한 건 73차례였다.
우리 역사에 ‘투사’는 적지 않다. 그러나 견결함과 유연함을 함께 갖춘 정치인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20년간 치열하게 싸우고 웬수같이 대들면서도 적장(敵將)과 스스럼없이 만나 담판을 벌이고 인간적인 관계까지 맺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었다.
정치가 무엇이냐를 논할 깜냥은 전혀 못되지만 내가 생각하는 정치를 말한다면 적과 친구가 수시로 바뀌는 세상사 속에서 그 사이를 조율하고 배려하고 그 사이에서 길을 내는 일이다. 김상현은 그 일을 했던 정치인이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인숙 여인 사건 당시 국회에서 “정 여인에 관계된 사람이 26명이나 된다고 하고 총리가 관계되었다, 대통령이 관계되었다, 이렇게까지 얘기가 돌아다닙니다.”라고 폭탄 선언을 해 버려 국회를 뒤집어 놓았던 것이 그였다. 그때 국회에서 공화당의 돌격대장이 바로 10.26 당시의 경호실장 차지철이었다. 차지철은 “사과시켜!” 때려죽일 듯이 악을 썼지만 그런 정치적 차이를 넘어 김상현은 국회의원 동기 차지철과 돈독한 친구 사이였다. 김상현의 친화력은 대단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서방파 두목 김태촌은 고향 친구로서 “친화력과 추진력이 있었던” 김상현을 깍듯이 모셨다고 하며 김상현이 어려울 때 도움을 줬다가 남영동 고문 분실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죽기 전 회고에서 밝힌 바 있다. 어디 깡패 뿐이랴. 김상현은 1979년 11월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보안사 서빙고실에 끌려가설랑 허벌나게 두들겨 맞다가 전두환한테 끌려가서도 권커니잣커니 술을 먹기도 했다. 그때 전두환이 갑자기 권총을 빼서 자기 심장을 겨눴다고 한다. “나는 보안사령관만 해도 일생의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이오. 나는 야심 같은 거 없습니다” 그때 김상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새끼 욕심 많은 새끼구만.”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지냈으되 결정적인 순간 그와는 살풋 어긋났던 이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김상현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이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 되어 가는 과정의 이정표 노릇을 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YS가 늙수그레한 야당 리더들을 치고 나왔을 때 이를 무모하다고 고개를 젓던 김대중의 등을 떠민 사람이 바로 김상현이었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안 끼면 앞으로 판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말이 있다고 표현한 것은 김상현 본인의 말이기 때문, 김대중 전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회고하며 김상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전두환 정권의 몰락의 유의미한 시작이었다 할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 창당의 주역도 그였다. 김대중은 신당 창당에 반대했지만 김상현은 김영삼계와 연합한 민추협을 주도하며 신당 창당을 밀어부쳤고 그 성과는 김대중의 금의환향의 레드 카펫이 됐다.
김상현은 김영삼이나 김대중처럼 드높은 봉우리 같은 정치인은 못되었으되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고갯길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 큰 산들의 양지바른 자리에 뿌리내려 몸을 불리는 거목이 애초 될 수 없었다. 그래서 6선 의원에 그 드넓은 마당발과 정치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야당 대표는 고사하고 사무총장, 그 흔한 원내 총무도 못해보고 정계를 마감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그 태산들로부터 뒤통수를 맞기도 한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상현은 4자 필승론을 주창하며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는다. 김대중 자신 이때의 선택을 뼈아프게 후회한다고 얘기하기도 했거니와 개인적으로는 김상현의 판단이 옳았다고 보는데, 아무튼 김상현은 통일민주당에 남아 김영삼을 돕는다.
그러나 1990년 3당합당이 별안간 선포되면서 그는 격렬히 분노한다. 역사에 남을 사진이 된 노무현의 “이의 있습니다.” 사진 옆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이가 바로 김상현이었다. 그리고 다시 김대중과 함께 하지만 그리 빛을 보지 못한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짜디짠 미역국을 먹은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영국으로 가면서 민주당을 맡긴 건 김상현이 아니라 이기택이었다.
하지만 김상현은 이런 류의 서운함을 분노로 표출하거나 “그 사람 앞으로 안봐” 버린 적이 없다. 고빗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에게 아픈 소리를 하거나 대놓고 길을 막았던 DJ 가신 그룹의 좌장 권노갑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김상현은 지금껏 한번도 나를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깍듯하게 나를 ‘형님’으로 대하며 어떤 자리에서도 나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내가 만나본 정치인 가운데 가장 통이 크고 포용력이 큰 사람이다.” (동아일보 2014년 6월 14일자)
조금 틈이 벌어지거나 의견이 갈라지면 벌떼 같은 양념들이 드럼으로 퍼부어지고 사생결단 건곤일척의 드잡이질이 난무하며 상대방을 인간 이하로 깔아뭉개기 일쑤인 세상이어서 그럴까, 김상현같은 정치인이 많이 아쉽다.
또 비록 태산은 못되었으나 태산 같은 정치인 앞에서 아닌 건 아닙니다 할 수 있었고 태산의 존재를 일깨우며 당신은 이리해야 합니다 바른말 할 줄 알았던 고인을 떠올리면 “아무개의 복심”이니 뭐니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나 숫제 대통령과 악수하는 자신의 등짝을 포스터로 쓰는 전직 전대협 의장님 출신의 후보들 앞에서 앞서의 아쉬움이 배가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