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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의 여자, 엠마 하트

런던에 가는 프랑스 사람들은 좀 약이 오를 것 같다. 트라팔가 광장이니 워털루 역이니 프랑스로서는 아픈 기억들을 지명 삼은 데가 많으니까 말이야. 워털루에서는 영국의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이 나폴레옹을 최종적으로 몰락시켰고 트라팔가는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을 결정적으로 무산시키고 프랑스 해군을 탈탈 털어버린 해전이 벌어진 곳이지. 1805년 10월 21일의 일이었어.

이 전투를 지휘한 넬슨 제독, 이미 전투로 한쪽 팔과 눈을 잃고 이도 대부분 빠져 있던 이 불굴의 노장은 프랑스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최후만큼은 이순신과 비슷하게 장렬해. 그는 총을 맞은 것을 숨기고 전투를 지휘했고 마지막 순간이 오자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한 뒤 숨을 거두니까.

그런데 그 전쟁 이전의 넬슨은 이순신과 좀 많이 달랐어. 물론 이순신도 “밤에 여진과 몇 번을 했다”고 꼼꼼히 적어 놨을 만큼 금욕적인 생활을 한 건 아니었지만 넬슨에 비하면 수도사에 가깝지. 그렇다고 넬슨이 난봉꾼이냐 그건 아니었어. 오히려 한 여자를 지나치게 사랑했다고 볼 수 있지. 엠마 하트라는 여자를. 지나치게라는 말도 모자란다. 미친 듯이.

원레 엠마 하트의 본명은 엠마 라이언. 그리고 결혼 뒤에는 엠마 해밀턴이었던 유부녀였지. 그는 우리 말로 ‘반가(班家)의 따님’이 아니었어, 양반 귀족은커녕 대장장이의 딸이었지. 그나마 일찍 아버지가 죽어서 말할 수 없는 곤궁 속에서 자라났어. 하지만 그녀에게는 꽤 천부적인 미모가 있었지. 3류 배우 생활도 하고 고급 창녀 노릇도 하다가 한 귀족의 정부가 돼. 그런데 이 귀족이 엠마에게 싫증이 났는지 지참금 욕심이 생긴 건지 정식 결혼을 하려고 했고 자연스레 엠마는 사랑스런 정부에서 보기 싫은 혹이 된다. 그렇다고 무정하게 내칠 수도 없어서 그는 엠마를 자신의 삼촌뻘 되는 홀아비에게 보내 버려. 윌리엄 해밀튼이라는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였어.

이 나폴리에서 엠마는 날개를 단다.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와 레옹이 하던 놀이 기억하니? 영화 속 캐릭터들을 흉내낸 의상과 표정과 연기로 그 캐릭터를 알아맞히는.... 마틸다는 섹시한 목소리로 “대통령 각하 생일 축하해요”를 부르는 마릴린 먼로 흉내를 내던. 엠마가 그 비슷한 놀이의 대가였어. 이를테면 클레오파트라 의상을 하고 나와서 연기를 하면서 누군지 알아맞춰 보라는 식. "attitude"라 명명한 이 놀이에 나폴리의 외교관 전부가 홀딱 넘어갔어. 뭐 연기가 훌륭한 측면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속옷을 입지 않고 연기를 했다나 어쨌다나.

그렇게 나폴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엠마는 나폴리의 여왕에게서도 신뢰를 얻었고 자신의 주인(?)이던 윌리엄 해밀튼으로부터는 사랑을 얻어. 해밀턴은 나이를 초월하여 그녀에게 청혼하고 마침내 엠마는 엠마 해밀튼의 새 이름을 얻는다. 대장장이의 딸이자 이 사람 저 사람의 정부로 기구한 팔자를 그리던 여자가 별안간 대영제국의 백작부인이 된 거지.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팔자는 순탄하지 못했어. 1798년 한 남자가 나폴리를 방문한 거야. 바로 호레이쇼 넬슨 함장이었지.

여섯 달 동안 여자를 보지 못하고 바다에만 떠 있었던 처지라 그런지 넬슨도 눈이 번쩍 띄었던 것 같아. 오죽하면 자기 마누라에게 처음 본 여자 칭찬을 이렇게 했을까. “사랑스런 자태와 처신을 지닌 젊은 여인이오. 그녀가 어디에 있던 그녀는 그 곳을 영광스럽게 하오.” 이미 스파크는 일었다고 봐야지.

프랑스군의 침공 위협에 전전긍긍하던 나폴리에 넬슨의 프랑스 함대 대파 소식 (아부킬 해전)이 들려오자 엠마 해밀턴은 거의 기쁨의 패닉 상태가 된다. “이처럼 영광스럽고 완벽한 쾌거는 일찍이 있었을지요. 저는 이 기쁜 소식에 기절할 것 같습니다. 위대한 승리자 넬슨과 같은 땅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러워요. ….. 윌리엄 경과 저는 당신을 어서 포옹하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답니다.” 헹. 웬 남편 끼워넣기 신공. 얼마 후 넬슨이 나폴리에 도착하자 엠마는 실신하듯 그의 품에 뛰어들어. “하느님 이게 정말 현실이겠지요?” 아마 하느님도 입을 내미셨을 거다. "그래 진짜다 이 여자야. 어 눈꼴 시어."

그런데 엠마 하트의 늙은 남편 해밀턴은 이 로맨스를 묵인해. 글쎄 조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질투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넬슨을 비난하지도 않았어. 원래 영국 상류층 사회는 “즐기는 건 좋지만 (배우자에 대한) 로열티는 버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 유부남 제독과 유부녀 외교관 부인은 순식간에 그 불문율을 수채 구멍으로 처박고 만다. 나폴리의 혁명을 피해서 시실리에 주둔 중이던 넬슨과 고령의 외교관 해밀튼은 동시에 소환을 받는데 이때 이들은 영국 해군 배를 타지 않고 육로로 이동해. 그 이유로 영국 해군 병사들이 이 기묘한 세 사람을 태우기를 거부했다는 설이 있더라고. “바람난 제독에 그 정부, 그리고 오쟁이진 남편을 한 배에 태우라고? 부정 탄다 부정 타! 재수없소!”

사랑에 빠진 넬슨은 본부인에게 그럴 수 없이 매정해. (원래 본부인과는 재산 때문에 결혼했다는 설이 있더군.) 애인과의 이별을 요구하는 부인에게 “수입의 반을 줄 테니 꺼지시오.”를 부르짖고는 평생 만나지 않아. 그리고 엠마 하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딴 ‘호레이시아’를 선사하며 (넬슨의 이름은 호레이쇼) 자기 딸이라고 도장을 박지. 놀랍게도 윌리엄 해밀턴은 이 두 사람과 함께 살다가 늙어 죽는다. 엠마 하트는 해밀튼이 병상에 눕자 열렬하게 간호했고 넬슨도 그의 죽음에 슬퍼해 마지 않았다니 도무지 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어.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 둘은 핑크빛 대로가 남았을 것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론이라는 건 무시 못해. 이혼 자체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고. 국왕 조지 3세조차 넬슨에게 “거 배에다 애인 태우고 다니는 건 영웅이 할 일이 아니네!” 하면서 타박을 줬거든. 넬슨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다시 한 번 대승을 거둬 영웅이 된 뒤 축복받으면서 엠마와 결혼하는 거였어. 영국 침략 작전을 기획하던 나폴레옹이 그 제물이 됐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철저하게 때려부순다. 그때 넬슨의 말은 성문종합영어에도 나왔지 아마?
“영국은 제군 모두가 그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그의 의무는 대승이었어. 영국을 위해서. 그만큼이나 간절하게 엠마와 사생아로 남아 있는 자기 딸을 위해서. 저격병의 총을 맞은 뒤 죽어가면서 걱정한 것도 엠마와 호레이시아였지. “I leave Emma, Lady Hamilton, therefore, a legacy to my King and Country, that they will give her ample provision to maintain her rank in life.. 이제 나는 엠마를 떠나야 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 공훈을 세운 만큼 나라는 그녀의 삶에 충분한 보상이 있을지어다.” 넬슨은 진심으로 한 여자를 사랑했고 자신의 공훈을 들먹이면서까지 나라에 자신의 두 여자를 위해 호소했지. 그러나 영국은 예나 지금이나 냉정한 나라. 정식 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엠마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해.
엠마는 영국 최고의 영웅의 피앙세에서 낭비벽 심한 귀족의 미망인으로 복귀했고 그 말로는 뻔한 것이었어. 넬슨 제독은 죽어서도 영국 최고의 영웅이 돼서 수만 명의 배웅을 받으며 성 바오로 사원에 묻히지만 그 애인과 사생아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심지어 돈을 갚지 못해 채무자 감옥에 갇혔다가 넬슨의 친구들이 도움을 줘서 겨우 프랑스로 탈출해서 거기서 죽어가게 돼.

나폴리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시실리만큼 온화하지도 않은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에서 가난 속에 죽어가면서 그녀는 여전히 바다를 보고 있었을 거야. 한때 바다를 누비던 자신의 영웅, 자신이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남자의 잔영을 파도 속에서 자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못말린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부하들마저 혀를 차고 왕도 타박하는 폭풍우 속을 뚫고 나아가던 그들의 사랑의 항해를 추억하며.

ㅡ From 후배 김형민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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