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개의 컨텐츠가 차례로 지나갑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재빨리 클릭 해야겠죠? ^^

울밑에선 봉선화(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1941년 8월 30일 홍난파(洪蘭坡)가 죽었다. 그의 본명은 후(厚)자 돌림의 홍영후고 난파는 아호인데 그 아호를 지은 사람은 홍난파 본인이나 친구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 국악에 조예가 깊었고 악기를 잘 다뤘던 아버지 홍준은 풍류객답게 아들들에게 금파(錦坡 :비단 언덕)니 난파(蘭坡 )니 하는 호를 내려 줬다고 한다. 거기에 아버지는 한글 성서 번역에 관여할 만큼 일찍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선교사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이기도 했다.  고향인 경기도 남양을 떠나 서울로 온 뒤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며 홍난파는 서양 음악의 세례를 받게 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새문안 교회에서 홍난파는 성가대를 하고 바이올린을 배웠다.    


 1897년생인 홍난파가 스물 세살 되던 1919년. 이 해에 일어난 3.1항쟁은 수많은 청춘들의 인생을 바꿔 놓거나 최소한 지워지지 않는 지억을 남기게 된다.  그즈음 홍난파는 동경 유학 중이었다.  그는 2.8 독립선언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자기 몸보다 애지중지했던 바이올린을 저당잡혀 마련한 돈으로 독립선언문을 찍어내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한다. 이 이력으로 인해 홍난파는 불령선인으로 찍혀 향후 진학 등에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천상 예술가이지 투사는 못되었다. 1931년 나이 ‘서른 즈음’의 홍난파가 쓴 글을 보면 일종의 애늙은이의 회한(?) 같은 게 느껴진다.  “부형(父兄)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학자(學資)까지 대어주며 공부시키는 것을 다소곳이 달게 받았던들 연희전문학교를 제 1회로 졸업했을 것이요, 세브란스를 그대로 꾹 참고 계속만 했더라도 지금쯤은 의학박사 한 개는 갈데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처럼 들어갔던 동경 음악학교만 하더라도 만세통에 튀어 나오지만 않았던들 관립학교란 큼직한 간판 밑에서 대도 (大道)를 횡보(橫步)했을 것이요. 일본대학 문과를 2년만 더 다녔더라면 문학사란 훌륭한 미서(眉書)를 명함 꼭데기에 박아가지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1931년 2월 20일 조선일보 ‘유모레스크’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세브란스 의전에도 적을 두었고 (그의 가문에는 의사가 많다) 천성이 끌리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가 ‘만세통’을 만나 튕겨 나와 버렸고 일본 대학 문과도 독립운동 이력 등으로 인한 눈총 때문에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니 그의 20대도 참 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스물 셋이었던 1920년,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노래 멜로디를 짓는다. <봉선화>.  


 1919년의 질풍노도는 수천 명의 희생과 결단을 낳으며 잦아들었다. 바이올린을 저당잡혀 가며 독립운동에 열을 올렸던 홍난파 역시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만세 부르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비명도 귀에 쟁쟁했으나 일본 경찰이 칼 휘두르는 슁슁 소리에 자라목도 됐을 것이다. 그렇게 만세 부르며 일어섰으나 별로 바뀐 것도 없이 기세 좋게 휘날리는 일장기를 바라보며 슬픔에 젖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그는 바이올린 연주곡 하나를 짓고 <애수>라 이름 붙인다. 그 몇 년 뒤 홍난파는 이웃에 살던 시인 김형준에게 가사를 의뢰하게 된다.  김형준의 집에는 봉선화가 만발했고 그는 꽃들을  바라보며 “참 우리 민족 같은 신세군” 같은 한탄을 곧잘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사에는 그런 한스러움들이 곳곳에서 물들어 번져난다. 노래의 3절을 특히 주목해 보시라.   

 

울밑에선 봉선화(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북한에서도 이 노래를 부르고 음악 시간에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노래와 홍난파에 얽힌 또 다른 전설까지 전하고 있다.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홍난파는 고향에 내려갔는데 울적한 심사를 달래고자 바이올린을 켰다. 그런데 이웃에 살던 봉선이라는 처녀가 찾아온다.  “오빠 바이올린 소리도 이제 다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곡조 들을 수 있을까요?”  홍난파에게 글을 배웠고 노래를 익힌, 홍난파를 오빠처럼 따르던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무너진 집안을 먹여살리기 위해 방직공장에 팔려 가야 한다고 했다. 


 봉선이는 이름처럼 봉선화를 유달리 좋아했고 해마다 봉선화 꽃물을 들이며 홍난파에게도 자랑하곤 했었다. 또 자기집 뜰에도 홍난파의 울타리 아래에도 봉선화 꽃씨를 뿌려 철이 되면 봉선화가 만발하도록 했었다.  “이제 오빠를 언제 볼지도 모르겠어요. 나를 위해 바이올린 한 번 켜 주세요.”  


홍난파는 바이올린에 활을 갖다 댔다. 그녀가 익히 아는 노래를 들려 주려고 활을 움직이는데 울컥 하면서 새로운 악상이 머리를 스쳤다.  열 일곱 살에 공장에 팔려가야 하는 슬픈 소녀. 그녀에게 들려주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바이올린.  홍난파의 어깨는 머리 속에 흐르는 악상에 따라 흐느적거렸고 손가락은 그때껏 없던 지점들을 짚었다. 그게 연주곡 <애수>였다는 것이다. (북한 라디오 대담을 소개한 연합뉴스 2001/05/31, 정상용 기자)


 남쪽에선 들어본 적 없는 북한의 전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봉선화>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보면 눈물 그렁그렁한 봉선이가 노래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고, 자신이 심어놓은 봉선화 꽃들을 어루만지고, 아직 꽃물 가시지 않은 손톱을 바라보고, 기약 없는 이별을 고하며 마지막 바이올린 감사한다고 허리 깊숙이 숙인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까지,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눈앞을 스쳐가게 된다.  김형준에게도 이 얘기를 들려 주었던 것이 아닐까. “김형. 그때 그 봉선이가 말이요.........” 


 이 노래는 오히려 홍난파의 다른 노래에 비해 뒤늦게 퍼진 노래다.  1940년 소프라노 김천애가 일본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 것이 레코드로 취입되면서 히트를 친 것이다 열에 여덟 아홉은 봉선이와 다를 처지가 아니었을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과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에 공감하는 중늙은이들,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며” 독립을 꿈꾸던 의지의 조선인들까지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 것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처지를 각자의 노래에 실었다고나 할까.  


 1948년 10월 제주도 출동 준비 중이던 14연대에서 반란의 총성이 울렸다.  군내 좌익들의 봉기였다. 여수와 순천이 좌익들에게 점거되고 한국 정부군이 다시 좌익들을 소탕하고 여순 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  봉기한 좌익은 우익들을 잔인하게 솎아냈고 우익들은 갑절로 그 피를 갚았다. 이 와중에 좌건 우건 아니면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람들이건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갔다.


 여수를 장악한 좌익들은 우익 인사들을 끌고 와 처형할 채비를 갖춘다. 무슨 조화인지 좌익 봉기군 하나가 “죽기 전에 노래 하나씩 해 보라.”고 말을 건넸다. 그때 우익 항만노조 조직위원장 김창업이 담담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장강뉴스 , 이형문 작가가 겪은 여순사건)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산 채로 불에 태워질지 총에 맞을지 죽창에 찔릴지 도무지 앞길이 캄캄하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불렀고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그리고 다 죽었다.    


 좌익들의 시간은 며칠 가지 않았다. 이제는 진압군의 시간이었다. 해군까지 동원된 대한민국 정부의 반격은 압도적이고도 냉혹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우익들의 눈에도 핏발이 섰다. 좌익세가 강했던 순천 지역 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은 폭도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 와중에 인기 많고 다정했던 순천여중 음악선생 김생옥이 걸려든다.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끌고 가서 총알밥을 안기는 상황에서 김생옥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김생옥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당시 순천여중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노래를 들은 진압군 장교가 총살 중지를 명령하려고 손을 휘젓는데 병사들이 사격 개시로 알고 쏘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KBS 뉴스 2020년 5월 15일) 


 김생옥 선생이 가르쳤던 순천여중 7기생들은 반란과 전쟁의 소용돌이 와중에 학적부가 사라지고 불타 재학 사실 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끈질기게 동창회(?)는 가졌고 그때마다 그 모임의 말미에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부르며 다정했던 선생님을 기렸다고 한다. 그 노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1941년 8월 30일 홍난파는 임종하면서 연미복을 입혀 달라고 했다.  끝까지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게 여의치 않자 연미목을 입힌 채 화장해 달라고 한다. 음악인으로서의 열정은 사뭇 대단했던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민족 의식‘은 그렇게 투철하지 못해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는 친일로 돌아서고 친일 노래도 작곡하여 친일파라는 낙인이 이미 부과돼 있기도 하다. 


그의 친일 이력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 어느 행사에서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넣은 데 대해 “친일파의 노래를!!”이라며 분노하는 이들을 보면서는 혀를 찼다.  <봉선화>는 홍난파만의 노래가 아니며 수많은 ’봉선이‘들의 노래였고, 좌익의 손에 죽는 우익과 대한민국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하는 좌익(으로 몰린) 교사의 노래였던 것을.  어떻게 80년 뒤에 사는 사람이 그렇게 칼로 두부 썰 듯 역사와 노래를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홍난파가 친일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보탤 마음이 없다. 친일행각은 명백히 밝혀서 기록으로 남기면 될 것이다. 단 그가 친일파든 아니든 그의 노래는 우리 역사와 문화의 일부다.  친일파여서 그 일부를 지운다면 이는 우리가 경멸해마지않는 문혁(文革)의 일원이 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From 김형민PD (SBS CNBC)

 < 난파의 노래를 돌아보며 >

ㅡ 1941년 8월 30일


도서, 책, 그림, 그림책, Picture book, Drawing, Art, 국내 최고의 만화책 그림책 창작 그룹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앞으로 펼쳐질 아름답고 위대한 영웅들의 모험담을 즐겨보자!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줄 것이다.

* 배너 교환 大환영 : 책이 들어가 있는 자리가 배너가 들어갈 자리입니다... 연락처 - bookobookbot@gmail.com ^^. Powered by Blogger.

내 블로그 목록

추천 게시물

그림 그릴 때 참고하기 좋은 사이트 TOP 5

① https://www.artstation.com/ ② http://portraitsfordrawing.tumblr.com/archive ③ http://reference.sketchdaily.net/en ④ http://ww...

텍스트

여러분의 원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bxp@daum.net 으로 보내주십시오

google.com, pub-2191483202263706, DIRECT, f08c47fec0942fa0

google.com, pub-2191483202263706, DIRECT, f08c47fec0942f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