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아내 >
“연애는 연애되는 순간 그 자체가 정점(頂點)이다. '황금시대는 황금시대가 오기 바로 직전에 있다'는 말이 있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노랫가락도 있지만, 이 두 마디 말이야말로 연애 미학에 있어서도 그대로 하나의 공리(公理)가 된다. 다시말하면 그리운 마음이 싹터서 꽃피는 순간까지가 그 황금시대요 절정이다...... (중략)
연애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결합의 선(線)이니, 결혼하여 부부애, 육친애로 변성하는 길, 다시 말하면 '변성적인 사랑의 코스'요, 다른 하나는 결별의 선이니, 떨어져서 서로 사모하며 영원히 맺어지지 않는 연인애(戀人愛)로 환원하는 길, 바꿔 말하면 '슬픈 사랑의 코스'가 그것이다. 슬픈 사랑의 코스에는 겉으로는 결합하면서 실상은 영원히 떠나는 방향으로 정사(情死)라는 것이 있고, 변성되는 사랑의 코스에는 벌어지면서도 만나는 길을 막지 않는 우정으로의 길도 있다.
짝사랑은 연애 감정으로는 최고 경지지만, 형태미(形態美)로는 변상적(變常的)인 것이고 장난사랑은 겉보기는 연애 같지만 내용미로는 천박한 것이다. 풋사랑은 앳되고 울고 싶은 것이 좋고, 청신하고 서정적이어서 좋다. '늙은 사랑'은 구수하고 슴슴한 것이 좋고, 소박하고 관조적(觀照的)인 것이 좋다.“
뭔가 연애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다년간의 경험을 거친 것 같지만 뭔가 또 연애와는 걸맞지 않고 무뚝뚝함이 뚝뚝 떨어지는 단어들로 구성되기도 한 이 연애론(?)을 쓴 이는 누굴까? 당연히 유명한 시인이니까 한 번 맞춰 봐라. 맞추면 내가 전복죽 한 그릇 사 주지. 하나 둘 셋. 이 사람은 조지훈이다. 하지만 이 양반은 그렇게 화려한 연애를 못해 본 걸로 알아. 나이 스무살에 결혼한 아내와 해로한 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그와 청록파 동인이었던 박목월의 자유분방함과는 사뭇 결이 다른 진짜 ‘선비’였으니까.
그는 나이 열 일곱 살 때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이 옥사했다. “만주의 호랑이”라고 불리운 맹렬 독립운동가였지만 그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어. 그를 거둔 게 만해 한용운이었어. 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지은 집 심우장 (길상사 가는 길에서 좀 다르게 길을 잡으면 철거 직전의 옛 집들 사이에 지금도 있다)에 그 영구를 모셨는데 조지훈은 험악한 일경의 눈초리에 아랑곳없이 아버지와 함께 찾아가 조의를 표한다.
어렸을 때 배운 한학과 조선어학회 일을 하면서 익힌 넓고 깊은 조선어 이해, 일제 때 붓을 꺾고 은둔했던 절에서 접한 불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와 경험과 학문을 몸에 둘렀던 그의 시 세계는 한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이라고 해. 당연하게도 이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그의 ‘승무’를 읽으며 참 우리 말이 이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감탄했던 기억은 명징하다. 얄븐사 하이얀 고까른 고이저버 나빌레라. 소리나는 대로 적어도 보기도 했었으니.
하지만 그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서슬 퍼런 선비였어. 언젠가 가톨릭 대주교와 얘기를 나누면서 대주교가 “인간은 담뱃불만 스쳐도 그걸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하자 조지훈이 “(살을 지지는) 인두가 식었다 더 달궈서 가져와라.”고 했던 성삼문의 예를 들어 반박했어. 대주교가 시큰둥하자 조지훈은 성냥 대여섯개에 불을 붙여 손등에 올려 놨다네. 무슨 장발장도 아니고! 전쟁 중 종군작가단 시절 문인들이 음주 후 노래를 하는 걸 보고 격노한 군인이 총을 들이대자 그 뺨을 후려갈기며 “총으로만 애국하는 줄 아느냐?”고 호통치고 사과받아낸 일화도 있고.
유명한 <지조론>을 통해 곡학아세하고 권력에 빌붙는 행태를 거침없이 비판했고 정권과는 이승만 정권이든 그 뒤의 박정희 정권이든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딱 한 마디만 가져와 볼게.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만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도자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실망하였는가.” 누굴 말하는지 알겠지? 이승만. 뭐 지금 감옥에 있는 각하들도 비슷하다고?
이 꼿꼿한 선비는 나이 스물에 독립운동가이자 역시 경북의 꼬장꼬장한 선비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는다. 이름은 김위남이었는데 이 시인 남편은 그녀에게 ‘난희’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아내는 남편을 두고 이렇게 말하더군. “결혼하면서부터 남편을 스승처럼 존경하고 살았었지요.” 글 쓸 때 애들 떠들면 버럭 호통을 치고 몸은 약해서 툭하면 피를 토하면서도 누가 벽돌로 찍으려 해도 (좌익학생이 그랬대) 군인이 총을 들이대도 “네 이놈!”이 먼저 나오는 이 꼬장꼬장한 양반이랑 살기가 여간 퍽퍽했겠어. 거기다가 3남 1녀를 남겨 둔 채 나이 마흔 여덟에 훌쩍 떠나 버렸으니 야속하기도 할 거고.
그런데 부인 김난희 여사는 칠순에 접어들어서 남편을 재발견하게 돼. 어려서 서예 배우느라 붓을 배웠지만 그 뒤로 거의 손에 든 일조차 없었을 붓을 다시 잡게 된 거야. 남편의 시를 글씨로, 서화로 옮기는 작업이었지. “사람 마음이 늘 그렇잖아요. 까닭도 없이 마음이 시끄럽고,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수양삼아 쓰기 시작했어요. 나이 들어 조 선생 글 읽어보니 참 좋대요. 젊어서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죽을 때 가까워 그런가, 그 양반 남기고 간 시를 읽으면 모났던 마음이 둥글둥글해져요”.
함께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려웠던 남편을 죽은 지 수십년 뒤에야 재발견하는 한 할머니. 젊어서는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었다고 해. 하지만 남편의 글을 자신의 붓에 담아 옮기고 거기에 그림도 엮으면서 마치 함께 사진을 찍는 듯 하다며 좋아하셨다고 하네. 이분의 작품 역시 그저 심심 파적의 취미 수준은 넘어 있어. 원래는 깡깡 촌이었지만 요즘은 그래도 고속도로가 많이 뚫려 가기가 좀 편해진 경북 영양의 조지훈 문학관에는 김난희 여사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 있다.
남편 말로 ‘늙은 사랑’은 구수하고 슴슴한 것이 좋다 했는데 남편 초상화 앞의 아내의 웃음은 참으로 구수하고 슴슴하다. 오랫 동안 잊었던 자신의 재능을 남편의 시를 쓰면서 다시 발견하고 그를 통해 울퉁불퉁한 마음을 다스리고 동글동글한 마음으로 남편을 추억하는 한 할머니의 모습은 또 얼마나 소박하고 관조적인지. 단지 “그리운 마음이 싹터서 꽃피는 순간까지가 그 (사랑의) 황금시대요 절정”이라는 말에는 다소 이의를 제기한다. 사랑의 황금기가 그렇게 짧은 것 같지가 않네. 김난희 여사를 보면.
ㅡ From 후배 김형민PD
“연애는 연애되는 순간 그 자체가 정점(頂點)이다. '황금시대는 황금시대가 오기 바로 직전에 있다'는 말이 있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노랫가락도 있지만, 이 두 마디 말이야말로 연애 미학에 있어서도 그대로 하나의 공리(公理)가 된다. 다시말하면 그리운 마음이 싹터서 꽃피는 순간까지가 그 황금시대요 절정이다...... (중략)
연애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결합의 선(線)이니, 결혼하여 부부애, 육친애로 변성하는 길, 다시 말하면 '변성적인 사랑의 코스'요, 다른 하나는 결별의 선이니, 떨어져서 서로 사모하며 영원히 맺어지지 않는 연인애(戀人愛)로 환원하는 길, 바꿔 말하면 '슬픈 사랑의 코스'가 그것이다. 슬픈 사랑의 코스에는 겉으로는 결합하면서 실상은 영원히 떠나는 방향으로 정사(情死)라는 것이 있고, 변성되는 사랑의 코스에는 벌어지면서도 만나는 길을 막지 않는 우정으로의 길도 있다.
짝사랑은 연애 감정으로는 최고 경지지만, 형태미(形態美)로는 변상적(變常的)인 것이고 장난사랑은 겉보기는 연애 같지만 내용미로는 천박한 것이다. 풋사랑은 앳되고 울고 싶은 것이 좋고, 청신하고 서정적이어서 좋다. '늙은 사랑'은 구수하고 슴슴한 것이 좋고, 소박하고 관조적(觀照的)인 것이 좋다.“
뭔가 연애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다년간의 경험을 거친 것 같지만 뭔가 또 연애와는 걸맞지 않고 무뚝뚝함이 뚝뚝 떨어지는 단어들로 구성되기도 한 이 연애론(?)을 쓴 이는 누굴까? 당연히 유명한 시인이니까 한 번 맞춰 봐라. 맞추면 내가 전복죽 한 그릇 사 주지. 하나 둘 셋. 이 사람은 조지훈이다. 하지만 이 양반은 그렇게 화려한 연애를 못해 본 걸로 알아. 나이 스무살에 결혼한 아내와 해로한 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그와 청록파 동인이었던 박목월의 자유분방함과는 사뭇 결이 다른 진짜 ‘선비’였으니까.
그는 나이 열 일곱 살 때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이 옥사했다. “만주의 호랑이”라고 불리운 맹렬 독립운동가였지만 그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어. 그를 거둔 게 만해 한용운이었어. 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지은 집 심우장 (길상사 가는 길에서 좀 다르게 길을 잡으면 철거 직전의 옛 집들 사이에 지금도 있다)에 그 영구를 모셨는데 조지훈은 험악한 일경의 눈초리에 아랑곳없이 아버지와 함께 찾아가 조의를 표한다.
어렸을 때 배운 한학과 조선어학회 일을 하면서 익힌 넓고 깊은 조선어 이해, 일제 때 붓을 꺾고 은둔했던 절에서 접한 불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와 경험과 학문을 몸에 둘렀던 그의 시 세계는 한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이라고 해. 당연하게도 이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그의 ‘승무’를 읽으며 참 우리 말이 이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감탄했던 기억은 명징하다. 얄븐사 하이얀 고까른 고이저버 나빌레라. 소리나는 대로 적어도 보기도 했었으니.
하지만 그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서슬 퍼런 선비였어. 언젠가 가톨릭 대주교와 얘기를 나누면서 대주교가 “인간은 담뱃불만 스쳐도 그걸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하자 조지훈이 “(살을 지지는) 인두가 식었다 더 달궈서 가져와라.”고 했던 성삼문의 예를 들어 반박했어. 대주교가 시큰둥하자 조지훈은 성냥 대여섯개에 불을 붙여 손등에 올려 놨다네. 무슨 장발장도 아니고! 전쟁 중 종군작가단 시절 문인들이 음주 후 노래를 하는 걸 보고 격노한 군인이 총을 들이대자 그 뺨을 후려갈기며 “총으로만 애국하는 줄 아느냐?”고 호통치고 사과받아낸 일화도 있고.
유명한 <지조론>을 통해 곡학아세하고 권력에 빌붙는 행태를 거침없이 비판했고 정권과는 이승만 정권이든 그 뒤의 박정희 정권이든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딱 한 마디만 가져와 볼게.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만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도자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실망하였는가.” 누굴 말하는지 알겠지? 이승만. 뭐 지금 감옥에 있는 각하들도 비슷하다고?
이 꼿꼿한 선비는 나이 스물에 독립운동가이자 역시 경북의 꼬장꼬장한 선비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는다. 이름은 김위남이었는데 이 시인 남편은 그녀에게 ‘난희’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아내는 남편을 두고 이렇게 말하더군. “결혼하면서부터 남편을 스승처럼 존경하고 살았었지요.” 글 쓸 때 애들 떠들면 버럭 호통을 치고 몸은 약해서 툭하면 피를 토하면서도 누가 벽돌로 찍으려 해도 (좌익학생이 그랬대) 군인이 총을 들이대도 “네 이놈!”이 먼저 나오는 이 꼬장꼬장한 양반이랑 살기가 여간 퍽퍽했겠어. 거기다가 3남 1녀를 남겨 둔 채 나이 마흔 여덟에 훌쩍 떠나 버렸으니 야속하기도 할 거고.
그런데 부인 김난희 여사는 칠순에 접어들어서 남편을 재발견하게 돼. 어려서 서예 배우느라 붓을 배웠지만 그 뒤로 거의 손에 든 일조차 없었을 붓을 다시 잡게 된 거야. 남편의 시를 글씨로, 서화로 옮기는 작업이었지. “사람 마음이 늘 그렇잖아요. 까닭도 없이 마음이 시끄럽고,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수양삼아 쓰기 시작했어요. 나이 들어 조 선생 글 읽어보니 참 좋대요. 젊어서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죽을 때 가까워 그런가, 그 양반 남기고 간 시를 읽으면 모났던 마음이 둥글둥글해져요”.
함께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려웠던 남편을 죽은 지 수십년 뒤에야 재발견하는 한 할머니. 젊어서는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었다고 해. 하지만 남편의 글을 자신의 붓에 담아 옮기고 거기에 그림도 엮으면서 마치 함께 사진을 찍는 듯 하다며 좋아하셨다고 하네. 이분의 작품 역시 그저 심심 파적의 취미 수준은 넘어 있어. 원래는 깡깡 촌이었지만 요즘은 그래도 고속도로가 많이 뚫려 가기가 좀 편해진 경북 영양의 조지훈 문학관에는 김난희 여사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 있다.
남편 말로 ‘늙은 사랑’은 구수하고 슴슴한 것이 좋다 했는데 남편 초상화 앞의 아내의 웃음은 참으로 구수하고 슴슴하다. 오랫 동안 잊었던 자신의 재능을 남편의 시를 쓰면서 다시 발견하고 그를 통해 울퉁불퉁한 마음을 다스리고 동글동글한 마음으로 남편을 추억하는 한 할머니의 모습은 또 얼마나 소박하고 관조적인지. 단지 “그리운 마음이 싹터서 꽃피는 순간까지가 그 (사랑의) 황금시대요 절정”이라는 말에는 다소 이의를 제기한다. 사랑의 황금기가 그렇게 짧은 것 같지가 않네. 김난희 여사를 보면.
ㅡ From 후배 김형민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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