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부제 :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아사카와 다쿠미를 기리며
ISBN | 978-89-90509-58-1 03990
도서명 |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아사카와 다쿠미를 기리며)
공저자 | 백조종, 정종배
출판사 | 만물상자
발행일 | 2024년 7월 13일
판형 | 신국판, 무선제본, 412쪽, 520g, 152mm x 225mm x 20mm
정가 | 22,000원
메일 | bxp@daum.net
팩스 | 0504-392-5810
전화 | 010-5575-0308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3-68 부코빌딩 5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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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 출신의 인물이 한국의 문화와 자연 보존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탐구하는 이 책은 다쿠미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아사카와 다쿠미(朝川 巧, 1891-1931)는 1920년대 한국에 이주하여 많은 시간 동안 한국의 도자기, 민속 문화, 자연 보존에 기여했다. 다쿠미의 생애에 대한 탐구는 일본에서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는 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도 무척 존경받는 인물로서 그의 삶은 한일 양국의 문화적 교류와 협력의 가교로 여겨진다.
아사카와는 조선 시대의 도자기와 민속 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그 가치를 후세에 전달하려 했다. 그의 연구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 탐구를 넘어서,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과 사랑이 담겨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그 공통점을 찾고자 했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문화 간 이해와 협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복잡한 역사적 관계 속에서도 개인의 신념과 헌신이 어떻게 양국간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쿠미의 이야기는 단순한 평전이 아닌, 우리에게 주는 깊은 교훈과 영감을 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헌신이 어떻게 국가와 문화를 넘어선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생애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의 묘역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고,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했다. 이 책은 그런 다쿠미의 삶을 조명하며,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연결고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소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편저자 소개] - 백조종, 정종배
백조종
서울시청 국제교류과에 근무했고, 서울시 공무원 교육원의 일본어 교관을 지냈다.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도쿄사무소에서도 근무했으며, 일본 호쿠토시 명예시민으로서 경기도 포천시와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의 자매결연을 성사시켰다. 중앙대 건설산업기술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지방의회 발전연구원 객원연구원, 한국해외연수센터 사무국장, 한국공동주택 관리실무전문교육원장, 범아관광학원 일본어 학감, 베세토 민제공사 사장, 韓中합자 중경상림 기계화공정 유한공사 부동사장, 동남건설 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논문 : 국제법 기원과 주권론, 도시자치정부의 장기계획수립과정에 관한 비교 연구, 서울시 공공서비스의 민간화 방안에 관한 연구
역서: 『민간 합동 개발(제3섹타)』(중앙대 건설대학원장 황영주 교수와 공역)
정종배(鄭鍾培)
시인,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가톨릭문인협회 회원, 삼균학회 이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 운영위원,최학송 묘지 관리인 및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 이사, 망우역사문화공원 자문위원 및 해설사, 중랑문화원 중랑인문학글쓰기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음,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숙장 대행, 서울초중등문학교육연구회, 서울교원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함.
시집: 『산에는 작은 꽃도』(시문학사, 1999), 『안개 속에 소리가 자란다』(한국문연, 2005), 『그림자 흔들기』(한국문연, 2008), 『숫눈길』(한국문연, 2010), 『봄동』(한국문연, 2014), 『해찰』(문학의 문학, 2016), 인문학서: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지노, 2021) 외 다수
(작가 한마디)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디아스포라 한국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알면 알수록 그 휴머니즘의 매력에 빠져든다. 1914년에서 1931년까지 17년 동안 한국에서 펼친 한 사람의 활동을 함께 좇아가 보십시오.
검색에 사용될 주제어
일본;조선;백자;달항아리;도예;공예;망우리;농업;임업;식물;나무;소반;자연;도자기;잣나무;발아
[목차]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아사카와 다쿠미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이해와 감사 친선을 위한 아름다운 기록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영면한 두 식물학자
문화예술인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학」에서 배우는 행복
디아스포라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제1장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추모집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발간사
머리말
축사 (한국 측
축사 (일본 측)
축사 포천시
축사 호쿠토시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작은 거인
김성진 그로부터
자료관 건립 과정
성지순례
인간의 가치
순결한 영혼
교토의 귀무덤 및 망우리 다쿠미 묘
한일 공동 제작 및 흥행
사색의 길에 핀 성스러운 한 송이 꽃
영화 <백자의 사람> 포스터
맺는말
편집 후기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추모집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목차
제2장
아사카와 다쿠미 90주기 추모집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신불신을 선택하지 말고 정불정도 선택하지 말아라
개정증보판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영화 <길~백자의 사람~> 상영을 진행하는 모임
증보판의 간행에 즈음하여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와 시인 윤동주
조선의 흙이 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 아사카와 다쿠미
디아스포라와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사월이 오면
잣나무와 아사카와 다쿠미
잊지 말아야 할 형제, 다쿠미와 노리타카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를 만나러 가는 길
조선백자를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공덕(公德)
영화 <길-백자의 사람>이 보여 준 것들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을 품고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자료관을 다녀와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과 한국문학 및 망우역사문화공원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관련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국회 토론회 / [제2주제 발제]
국회 토론회 / [제2주제 토론문]
제3장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수림문화재단, 2016)
김희수 이사장의 생각 ‘인간도처유청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 인사 말씀
아사카와 다쿠미
폴 러쉬 (Paul Rusch)
동교(東喬) 김희수(金熙秀) 선생
동강(東江) 하정웅(河正雄) 선생
청리은하숙(淸里銀河塾)과 하정웅(河正雄)
단단한 씨앗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의 개교를 앞두고
양심적인 일본인과 일본법이 한국에 미친 영향
조선백자의 세계
대입 학생부전형 합격 전략 –어떻게 준비할까?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_ 개교 프로그램 평가 및 프로그램 계획안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을 열다
행복한 사람들 즐거운 배움의 길
홍림원(洪林園) 다쿠미(巧) 소나무 아래에서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1기 일본 연수를 다녀와서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가 나에게 주는 의미
나와 다쿠미의 백자
조선과 아사카와 다쿠미
Ice cream, I scream
역사를 마주하고
백자, 순백의 깊이
청리와 망우리 사이
진실속에 나를 찾다
날마다 일보전진의 마음
일어淸수
비밀의 묘지공원
그 마음이 닿기를
제4장
중랑인문학 글쓰기반 (중랑문화원, 2023)
아사카와 다쿠미 영화 <백자의 사람>
망우역사문화공원은 대한민국 호국의 산실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드신 아사카와 다쿠미
진흙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 디아스포라
조선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1905년 을사생 할머니의 손녀와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를 생각하다
광릉수목원과 아사카와 다쿠미
중랑인문학글쓰기반 공부의 즐거움
가르치며 배운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 40년 찬란한 인생 기록
친절한 다쿠미 씨
아사카와 다쿠미 연보
맺은 말
편집 후기
[책 속에서] [본문 중에서] [책 속으로]
조선인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布施辰治)변호사(1980~1953)
이 일본인은 2004년 10월 일본인으로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인물이다.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묵자의 겸애사상 등을 접하면서 지식과 정의, 사랑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1902년 메이지[明治]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판사·검사 등용 시험에 합격하여 판사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에 깊이 심취했고, 후세는 40세를 맞이하던 1920년 스스로 출세의 길을 끊고 본인이 출간한 잡지인 『법정에서 사회로』에 자기 혁명의 고백을 남김.
후세는 일본 내의 노동운동과 무산정당운동, 수평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고 시사 강연회와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 상담을 지속적으로 실시했습니다. ‘2 · 8 독립 선언 사건’에서는 조선인을 최초로 변호하며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하였고, 이후 수차례 조선을 방문하여 시국 강연회를 실시하고 토지 회수 운동을 돕는 등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을 실었습니다. 즉 3.1운동 이후 후세는 조선으로 건너와 김시열을 필두로 한 의열단원의 변호하고, 김해에서 열린 백정 철폐 운동인 형평사 창립기념 행사에 참여하고, 조선인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가 개최한 하계 순회 강연의 변사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런 후세의 활동에 조선에서는 그가 조선에 올 때마다 열렬한 환대로 그를 맞이한다. 패전 직후에는 조선의 독립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외국인으로서 독립투사 박열과 함께 조선 독립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재일 조선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호를 거의 전담하여 맡았다. 비록 후세도 사회 운동의 최전선에서 변호사로서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지만 스스로를 변호사 적임자라고 믿고 변호사업을 본인의 소명으로 여기면서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본문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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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913년 한국 도자기의 신이라 일컫는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는 1914년 5월에서 1931년 4월 2일까지 17년 동안 한국 임업시험소 고원과 기수로서 국립산림과학원과 국립수목원의 이사, 설계, 식재, 관리 등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대한민국 인공림의 37%를 차지한 잣나무를 씨앗 틔운 '노천매장법'을 발명하고, 쓰면 쓸수록 조형미, 실용성, 예술성 등이 빛나는 한국의 소반에 대하여 <조선의 밥상> 이라는 책도 펴냈다(1929년)
조선의 도요지 700여 곳을 답사하고 도자기 명칭, 용기 등을 그림으로 남기고 이름을 적은 유작 <조선의 도자명고>(1932년)를 발간하여 도자기업계으 중시조로 여겨진다.
1920년대 달항아리 백자대호의 예술성을 야나기 무네요시와 두 형제가 밝히어 영국 왕실에서 인도 무역상을 통해 사들여 전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미를 '이별의 미', '한의 미'라 하였으나, 두 형제는 도요지를 돌면서 굿, 연희 등을 통해 한국의 미는 '멋, 흥취, 가락'이라 말했다.
1924년 지금의 중앙국립박물관 민속박물관 전신인 <조선민족미술관>을 경복궁 집경당에 건립했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으로 살다가 식목일 준비 과로 급성 폐렴으로 40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가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5년 실렸고, 그의 고향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초등학교 교재로 일대기 만화가 교재로 작년부터 활용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일제시대 일본사람으로서, 헐벗고 굶주리는 조선사람들을 동정하여 때로는 문필로, 때로는 법정 변론으로 조선사람을 도우려다가 대세에 밀려 왕따가 된 사람들은 더러 알고 있다.
그러나 다쿠미처럼 스스로 조선사람이 되어 조선 사람과 애환을 같이 하다가 이 나라 흙이 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다쿠미가 3,000미터에 가까운 야쓰가다께 산록에 자리 잡은 야마나시현 카부또 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 1891년, 산림기사가 되어 조선에 건너온 것은 한일합병 직후인 1914년, 나이 23살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산이라 하면 으레 녹색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돌무더기만 노출되어 있는 적갈색(다쿠미의 표현에 따르면 적다색赤茶色)의 민둥산이었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수백 년에 걸친 부패한 정치와 끊임없는 외침에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임야에 대한 지적공부도, 소유권도 확립되지 못해, 대부분의 산은 이른바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기 때문이다.
이 처참한 산 색깔에 마음이 아픈 그는 이 산들을 다시 녹색으로 바꾸는데 자신의 잎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산들을 두루 돌아보고, 각 그 산들에 맞는 수종을 고르고, 그 잣나무 씨를 채집하여 노천발아에 성공함으로써(그 노천발아에 대한 그의 논문은 세계 임업잡지에 게재되어, 지금도 미국에서는 그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함) 그의 생전에 이 나라 산들은 어느 정도 녹색을 회복했던 것 같다.
이렇게 다쿠미는 이 나라 산천을 사랑하다 보니, 이 나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그 문화유물인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귀족들의 수집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청자는 알아도(당시까지 조선에는 도자기 수집 취미가 없었던 듯) 백자는 도자기 취급도 안 했던 시절에 백자의 그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자태에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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