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올림픽 개막식을 시청하면서 러시아 선수단이 입장할 때 가볍게 놀란 일이 있다. 그건 러시아의 인구 수가 1억 5천만으로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러시아가 왜 인구가 저것 밖에 안되나 싶었던 것이다. 일본과도 대차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러시아를 왕년의 ‘소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 영어로는 USSR로 표기하고 러시아어로는 CCCP로 표기되던 소비에트 연방. 왕년의 ‘소련’의 인구는 미국과 비등했고 근 3억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러시아’의 인구가 겨우(?) 1억 5천만이었으니 잠깐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1991년 3월 폭주하는 민주화 열망과 각 공화국들의 저항 속에 기진맥진한 소련 당국은 소비에트 연방 유지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그러나 소련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중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발트 3국과 몰도바 등 여섯 공화국은 참여를 거부했다.
소련 최고 회의는 “이 투표를 방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여섯 공화국에 경고를 보내는 한편, 과거 소련 공산당의 중앙집권적 통치 아닌 “동등한 주권 공화국들의 새로운 연방”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로 각 공화국들을 끌어들이고자 애쓴다. 어쨌든 단일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이 국민투표가 70년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는 사실은 소련이라는 정치적 체제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반증한다.
이 역사적 투표의 결과는 뭐라고 딱 한 마디로 묘사하기 힘들다. 전체적으로는 연방 찬성표가 더 많이 나와 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어깨에 힘이 실리나 했지만 모스크바나 레닌드라드 등의 대도시에서는 반반이거나 오히려 반대표가 많았고 우크라이나의 경우 전반적으로 찬성 비율이 높은 가운데 키에프 같은 대도시에서는 반대가 우세했던 것이다.
이 불안한 국민투표를 통해 재출발한 소비에트 연방은 5개월 뒤 소련의 극단적 보수파 (군부와 KGB)가 일으킨 엉성한 쿠데타를 겪으면서 결정타를 맞고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 기울어가는 소련 당국이 국민투표가 끝나자마자 했던 행동 중 하나는 발트 3국 중의 하나이자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 리투아니아의 국방 장관을 체포했다가 수 시간만에 풀어준 것이었다. 소련 당국은 어떻게든 발트 3국을 연방 안에 묶어 두기를 원했고 세 나라 국민들의 국민투표 보이콧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트 3국 국민들은 완강했다. 그들은 유라시아를 뭉뚱그린 거대한 연방 내 공화국의 국민이 아니라 작지만 주권을 가진 국가의 국민임을 재천명했다. 그들은 주장했다. “우리는 2주일 전에 국민투표를 했다.”
소련의 국민투표보다 조금 앞서 실시된 연방 탈퇴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발트 3국 국민들은 80퍼센트가 넘는 찬성표로 자신들의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소련의 고르바초프도 이미 이들의 독립 열망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 동유럽 국가 수준”의 독립 허용을 시사한 것이다. (1991.3.22 슈피겔과의 회견 중) 이미 흘러간 물이었고 지나간 버스였지만.
발트 3국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방죽이 무너지는 계기를 만든 작은 구멍이었다. ‘발트3국’이라고 묶어 말하지만 사실 세 나라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상이한 배경을 지닌다. 에스토니아는 핀란드 쪽과 더 가깝고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영향으로 가톨릭이 우세하다. 리투아니아는 독립의 지위를 누린 적이 있으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1918년 러시아 혁명 후에야 독립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기구한 운명의 나라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다시 소련의 먹잇감이 된 것은 1939년 리벤트로프 몰로토프 조약, 이른바 ‘독소밀약’ 때문이었다.
서유럽 정복의 야욕을 불태우던 히틀러는 동쪽의 붉은 곰 러시아를 회유해야 했고 그 댓가로 소련의 몫으로 ‘양해’한 것이 발트3국과 폴란드 동부 등의 땅이었다. 자신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발트3국은 갑자기 들이닥친 소련군의 낫과 망치의 깃발 아래 50년을 살아야 했다. 우리로 치면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발트 3국에서는 독립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였다. 1987년 에스토니아의 수도 리가에서 “스탈린에 의해 죽어간 이들의 추모식”이 열리고 소련 당국에 대한 저항이 표출된 후의 발트3국의 역사는 소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3국과 그를 막으려는 소련의 줄다리기의 연속이었다. 이 줄다리기 와중에 발트 3국 국민들이 보여준 독립 의지의 결정체는 1989년 8월 23일 이른바 리벤트로프 몰로토프 조약, 독소불가침협정 50주년에 일어난다.
발트 연맹을 결성한 발트 3국의 정치인들은 반세기 전 3국을 스탈린의 마수에 떨어뜨렸던 날을 기하여 하나의 황망하기까지 한 행사를 기획한다. 독소밀약을 통해 소련이 발트3국을 불법 통치해 왔음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라는 시위였다. 시위 방식은 다름아닌 ‘인간띠’였다.
소련 관영 타스 통신이 “불법 행위 엄단”을 연일 방송하고 그때까지는 살아 있던 루마니아의 독재자 (넉 달 뒤에 민중봉기로 총살당하지만)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 군을 동원하여 소련을 돕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으스스한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그 봉화가 올랐다.
탈린 시민들은 수십 년간 내보이지 못했던 국기를 들고 역시 오랫 동안 부르지 못했던 노래 <나의 사랑 나의 조국>, 부르기만 하면 시베리아 행이 확실했던 불온한 에스토니아 국가를 부르며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인간띠와 노래는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로 이어졌다.
발트 3국 사람들은 공히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길 즐긴다고 한다. (음 동이족인가) 두어 해 전 <나의 아저씨>에서 구성지게 흘렀던 <백만 송이 장미>는 라트비아에서 나온 노래다.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이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초바의 노래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실과 다르다. 원래 이 노래는 라트비아 작사가 레온스 브리에디스, 작곡가 라이몬츠 파울스가 만든 ‘마라가 준 인생’이 원곡이다. 1981년에 한 방송사에서 주최한 음악제에서 우승한 노래를 알라 푸가초바의 목소리로 녹음한 것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가사 역시 라트비아어로 만들어진 마라의 인생과 고난을 담았지만 러시아어로 개사된 노래에서는 가난한 화가와 여인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한겨레신문 2019,6,28, <책과 생각] 황우창의 어디서든, 음악)
인간띠를 이은 라트비아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불렀으리라. ‘마라’의 인생과 라트비아의 역사를 머리 속에서 뒤섞으면서.
도시의 경계만 벗어나면 황량한 평원으로 이어지는 그 길목 길목에 발트 3국 국민 200만 명이 모여들었다. 서로 언어와 문화가 달랐지만 비슷한 역사를 함께 한 그들의 마음과 목소리는 오직 이 한 단어만을 벅차게 부르짖고 있었다. '라이스베스(laisves- 리투아니아)', '브리비바(briviba-라트비아)', '비바두스(vabadus-에스토니아)'라고 외쳤다. 그것은 모두 ‘자유’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손이 이어진 길은 무려 600킬로미터. 발트 3국민들은 그 외침으로 공산주의 전제 통치의 종식의 신호탄을 쏘았다.
이 인간띠 시위는 소련 내 각 민족들을 들쑤셔 놓았다. 소련은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등 연속된 민족 분규에 시달렸고 공산주의의 철권 통치는 점점 주먹에 힘을 잃어갔다. 앞서 언급했듯 소비에트 연방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는 목적으로 소비에트 연방 최초의 국민 투표를 실시했을 때 그에 바로 앞서 3월 3일 “독립 찬반 투표”를 결행하여 결정적으로 김을 빼 버린 것도 발트 3국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독립을 쟁취했다.
노래 좋아하는 발트 3국 가운데에서도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노래 사랑은 지극하다. 5년 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지는데 5년마다 열리는 에스토니아 대합창제 ‘라울루피두’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수만 명이 모여들어 거대한 ‘떼창’을 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거니와 이 합창제의 피날레는 제 2의 국가(國歌)라 할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다.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
애정을 바쳤던 그대에게
노래하노라. 위대한 행운을
생기발랄한 에스티여.”
아마 오늘도 발트 3국은 노래 소리로 떠들썩할 것이다. 우리는 노래 논쟁으로 시끄럽지만. 사실 많은 나라의 국가(國歌)는 ‘공식적으로’만 불리는 경우가 흔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서 함께 부르는 ‘제 2의 국가’가 많다. 미국인들이 <성조기여 영원하라> 가사는 잘 못 외워도 <America is the beautiful>에 더 열광하듯이. 에스토니아 합창제가 <나의 조국 나의 사랑>으로 마무리되듯이. 국가(國歌)는 그렇다고 치고 우리나라에는 도시 <아리랑> 외에는 전 국민이 합창할 노래가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아 대한민국>은 전두환 냄새나서 진저리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인구의 1/3은 돌아앉을 것이고, “동방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으로 시작하는 김동진 작곡의 노래도 뭔가 닭살이고, <내 나라 내 겨레>는 대중성이 부족하고 <아름다운 강산>은 가사 외우기 어렵다. 떠오르는 건 <대한민국 헌법 1조>인데 뭔가 감수성이 떨어진다. <아침이슬>이 그나마 근접해 있을 것 같긴 하다. 역사적으로
가무음곡 좋아했던 우리 민족에게 왜 '거리낌없이 다 함께 부를' 노래가 적을까..... 발트 3국 노래 혁명의 날 노래에 대한 상념에 젖어 끄적인다.
From 김형민PD (SBS CNBC)
< 발트 3국 노래의 길 >
ㅡ 1989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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